한반도 병역기피 비리, 그 1천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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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욱의 기자수첩]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국회 국정감사에서 ‘병역기피 해외미귀국자 관련’ 자료가 공개됐다.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고 있는 병역기피대상 의심자가 올해 들어서만 801명, 지난 5년간 두 배 이상 늘었다 한다.

특히 이들 병역기피의심 해외미귀국자 중 수도권 주요지역, 강남 3구인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에 주소지를 가진 인원은 108명으로 5개 주요광역시(대전, 대구, 부산, 광주, 울산)를 합한 83명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병역기피의 역사는 조선시대부터 있어왔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 아들들도 요식적으로나마 군역을 치르는 제도가 있었으나 양반이 평민들과 군역, 즉 병역의무를 같이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빠져나갔다. 천민은 국가의 노비이거나 양반의 노비이므로 군역 면제.

평민은 징집되거나 대신 세금으로 군포(베) 2필을 바치는 것이 병역의무의 기본이다. 그러나 집안마다 징집되는 것도 1인당 군포 2필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래서 평민이 양반집 노비가 되어 피하거나, 머리 깎고 중이 되거나, 무작정 도망치는 기피사례가 생겨났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대신 징집 내지 노역에 보내기도 했다. 병무를 담당하는 쪽도 비리가 생겨났다. 베나 돈을 받고 징집된 자를 일찍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 갓난아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었는데도 죽기 전 밀린 군포 내라며 군적에서 삭제하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계속 군포를 거둬가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이나 이웃에 부과하는 족징(族徵)·인징(隣徵) 등 군복무제도가 백성을 무겁게 짓누르고 지방관리들에게는 부정축재의 수단이 되었다.

왕실 재정이 구멍 나 벼슬을 만들어 팔자 돈으로 벼슬을 사서 군 면제를 받았다. 돈으로 산 벼슬은 본래 납속이라고 해서 군면제 대상이 안 되도록 표식을 따로 해둬야 하는데 벼슬도 돈으로 사는 마당에 기록 고치는 것쯤은 손쉬운 돈 놓고 돈 먹기.

일제 강점기 말에는 징용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청년들이 산 속으로 항일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4년 경상북도 결심대(決心隊) 사건. 1945년 일본 중앙대학 유학생 출신이 이끈 지리산 보광당 사건, 1944년 경기도 포천(抱川)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사건, 강원도 사북면과 설악산 학병거부자 투쟁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학병이나 징병으로 끌려간 젊은이들 중에서도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이 된 사례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병역기피의 시작은 국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의 초대 사령관이자 이승만 정권의 막후 실력자인 원용덕의 아들에서 시작된다. 아들이 육사를 마치고 그 동기생 150명 전원이 전선에 투입될 때 자기 아들만 헌병 병과로 빼돌려 후방에 배치해 온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사건.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이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해 북한 땅에 묻혀 있고, 유엔군 벤플리트 사령관의 아들도 한국전선에서 실종된 걸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다.

1950년대는 징집을 연기하고 도망다니며 징집 나이를 넘기기도 했지만, 대학에 들어가는 게 가장 보편적인 병역기피 방법이었다. 허름한 건물에라도 대학이라고 간판 붙여 놓으면 학생지망자가 몰려들었다. 사립대학들은 청강생·보결생이라는 이름으로 정원이 넘치도록 학생들을 받아 부실부패 사학이 번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전쟁으로 호적이 손망실 되고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호적이 정리되지 않으므로 생겨난 병역기피도 있었다. 임시호적, 가호적을 만들면서 군대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는 것. 이때 병무행정이 병역비리의 온상으로 바뀐다.

1953년부터 10여 년간 시행된 해외유학인정 선발시험도 병역기피의 통로가 됐다. 해외로 유학 가 돌아오지 않으면 되는 것. 7천4백 명이 유학 떠나 6% 정도만 돌아왔다고 한다. 상류층 자제들의 병역기피이다. 2013 국정감사에 등장한 ‘병역기피 의혹 해외미귀국자 강남 집중’자료나 조선시대나 해방 이후나 병역기피의 모습은 거기서 거기인 셈이다.

(사진=이미지비트 제공)

 

◈ 이 나라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존재한 적이 없다

4.19 이후 민주당 정권이 병역미필자에 대한 일제 조사를 벌여 병역기피자 10만, 그리고 탈영자가 12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또 21살부터 30살까지의 공무원들을 조사해 병역미필자 2천7백 명이 적발돼 해임됐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자수하여 광명찾자”. 1960년대에도 병역의무 불이행자 지수신고기간은 계속 운영됐고 현역·예비역 의무불이행자 41만 명이 신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는 일부 강제노역에 동원돼 제주도 5.16도로 등 국토개발 사업에 투입되기도 했다.

1970년에 들어서는 병역비리에 대한 집중 조사가 이뤄졌다. 이때 병무직원 86명을 포함하여 380명이 처벌을 받는 대사건이 터지는 데 이것을 1차 병무비리 파동이라 부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병무행정을 수행할 병무청이 창설되었으나 1972년 7월에 2차 병무비리 파동이 발생해 부패척결 의지를 무색게 했다. 2차 병무파동 뒤에는 ‘병역법 위반 등에 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져 처벌이 대폭 강화되었다. 또 1968년부터 실시된 주민등록증 제도가 자리를 잡고, 1976년부터는 병무자료가 전산화되고, 기업들이 병역기피자 여부를 철저히 가려 채용하면서 병역기피는 10여 년 사이에 10%대에서 0.001%대로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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