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선(37) 씨는 대낮에도 방 안 전등을 켜놓는다. 잘 때도 불을 켜놔야만 잠이 든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과 불 꺼진 방에서 자야 할 때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그는 한여름 찌는 더위에도 찬물로 몸을 씻을 수 없다. 살갗에 닿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 아프기 때문이다.
밥 먹을 때는 폭식을 하게 된다. ''지금 아니면 언제 다음 끼니를 때울 지 모른다''는 걱정에서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두려움들, 지옥 같던 형제복지원에서 얻은 기억 탓이다.
1987년 3월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인 부산 형제복지원의 실상을 접한 국민은 경악했다.
그해 폐쇄될 때까지 이곳에서는 12년간 원생 513명이 죽었고 일부 시신은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3500여 명을 수용하던 이곳은 전두환 정권 시절 부랑인 선도 명목으로 역,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끌고 와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저항하면 고문했다. 심지어 살해한 뒤 암매장까지 했다. 그런 형제복지원은 매년 20억 원의 국고지원을 받고 있었다.
형제복지원 폐쇄 뒤 수천 명의 원생들은 아무런 보상도, 재활 교육도 없이 걸거리로 내몰렸다.
원장 박인근은 사건이 터진 뒤 정권의 보호 속에 1989년 2년 6월형을 확정지었다.
그렇게 사건은 축소됐고 박인근은 지금도 사회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한종선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원생 가운데 한 명이다.
2008년부터 형제복지원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 올리고 관련 자료를 찾아 온 그는 모두가 이 사건을 잊고 있던 올해 국회 앞에서 생존자들의 실상을 알리는 1인 시위를 벌였다.
그 와중에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인권활동가 박래군 이사의 도움으로 이 사건을 다시 세상에 알릴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물이 신간 ''살아남은 아이''다.
"복지원에서는 잠자는 시간이 제일 행복했어요. 꿈에서는 뭐든 할 수 있으니까요. 복지원을 탈출하는 꿈을 제일 많이 꿨죠. 새벽 4시 기상나팔 소리가 들리고 조장들이 침대 난간을 치며 ''기상''이라고 외칠 때면 ''오늘도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가장 응석 부릴 나이였는데요." 그는 한겨울 찬물을 뒤집어쓰고 성적 학대를 당하고 수시로 굶던 복지원에서의 생활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잊고 싶습니다. 행복한 추억은 잊힐 지 몰라도 복지원에서의 기억은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와요. 언덕을 오르다가도, 낡은 공중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도, 물을 먹다가도요."
그 기억은 책 속 직접 쓰고 그린 글과 그림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꾸미거나 만들어낸 것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글과 그림은 충격적이다.
한 씨는 책을 위해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억들이 떠올라 더욱 괴로웠다고 했다.
"복지원에 대한 제 기억은 3500명의 것 중 하나일 뿐입니다. 다른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도 평생을 따라다니는 두려운 기억들이 가득해요. 그들도 저와 같거나 더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복지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다른 생존자 4, 5명을 꾸준히 만난다고 했다.
그들이 한 씨를 먼저 찾아오는 일은 없다. 한 씨가 그들 각자를 만나러 가야 한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빠요. 만나도 서로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말은 웬만하면 안 해요. 같은 경험을 했으니 말할 필요도 없죠. 가정을 꾸린 형, 누나들도 있으니 피해 사실을 알리기 두려워 해요. 이해합니다. 제가 그들 몫까지 알려나가야죠."
한 씨 자신도 허리를 다쳐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를 잇고 있다.
형제복지원에 함께 있다 헤어진 뒤 2000년 정신병원에서 다시 찾은 아버지와 누이까지 돌봐야 하는 처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동물이었어요.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동물 말입니다. 복지원을 나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짐승으로 변해갔죠. 아마 더 비뚤어졌으면 괴물이 됐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달라요.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3500명의 피해자가 있어요. 그들이 저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길을 열고 제2, 제3의 형제복지원이 생기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이 마련되는 데 힘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