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도국 권영철 기자, 오늘은 어떤 얘길?
= 지난주 금요일 김현정 앵커가 소개했던 ''무죄를 구형한 검사'' 서울중앙지검 공판2부 임은정 검사와 관련된 얘기를 하고자 한다.
검사가 기소를 하고나서 무죄를 구형하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과거 문제가 됐던 재판을 다시 하는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구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임은정 검사는 논고에서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하였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밝혀 주목을 받고 있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가 위헌 결정을 받았고 민청학련 관련자들에 대해 법원이 이미 무죄를 선고한 뒤여서 무죄는 예정된 것이었지만 검찰이 ''과거사 반성문''을 쓰며 무죄를 구형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임은정 검사는 ''도가니 검사''로 ''난 대한민국 검사다''라는 내용의 일기가 공개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 [Why 뉴스] "임은정 검사는 왜 무죄를 구형했을까?"라는 주제로 왜 무죄를 구형했는지 검사 논고문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던 박형규 목사를 왜 ''거인''으로 불렀는지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 임은정 검사는 지난 6일 무죄를 구형한 뒤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사무실에서도 전화를 잘 바꿔주지 않고 있다.
무죄를 구형한 사실도 1주일이 지나서야 언론에 알려졌다. 박형규 목사에게 재심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됐다는 사실은 판결 당일 알려졌지만 검사가 무죄를 구형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민주통합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검사가 무죄를 구형했다는 말이 나온 뒤 언론이 판결문을 찾아냈고 그래서 일주일 뒤에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임은정 검사와 통화를 위해 다양한 루트로 접촉을 했지만 결국 통화는 하지 못하고 주변지인들과 미니 홈피를 통해 당시 임 검사의 심경을 알게 됐다.
임 검사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일기형식으로 무죄구형 당일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 무죄를 구형한 심경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 임 검사는 자신의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구형하던 당일의 심경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논고문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 다이어리 전문 |
| 오늘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되어 징역 15년을 선고 받으시고 옥고를 치르신 박형규 목사님의 내란선동 등 제심 공판이 열렸다. 오전 10시 40분 시간을 좀 넘겨 어느 할아버지가 법정 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서시는데.....아 저 분이구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땅을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민주주의의 새벽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 거인을 본다.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의 가슴에 날인하였던 주홍글씨를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우는 역사적인 순간에 나에게 이렇게 배역이 주어지다니!! 무죄 논고를 하며 몸이 떨리는 걸 어쩌지 못한다. 어제 당신이 목숨 걸고 만들려 했던 내일이 바로 오늘임을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
= 논고문이 화제가 된 글이다.
통상 중요사건의 논고문은 검찰 내 상급자의 결재를 받아서 법정에서 낭독한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은 구술 논고문이어서 결재를 받지 않고 임은정 검사 재량으로 작성해 법원에 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논고문 전문은 전체 다섯 문장인데 앞 세 문장은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서 알려졌고 뒷부분 알려지지 않은 문장 중에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몸으로 민주주의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함께 넘기고 있습니다"라는 글이 있다.
박형규 목사를 ''우리 시대의 거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은 법률적인 것으로 "무죄를 선고해 달라"며 무죄 구형의 구체적인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 논고문 전문 |
|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하였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몸으로 민주주의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함께 넘기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는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교체를 넘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폭동을 선동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 그건 아니다.
검찰은 ''검사동일체의 원칙''이 적용되는 조직이다. 따라서 검사 개인의 판단으로 무죄를 구형하는 일은 없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무죄를 구형하려면 공소심의위원회심의를 거쳐야 한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미 대법원과 각급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했고, 다른 관련자들도 이미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이지만 그래도 검찰 내부에서는 논의를 거쳐 상급자의 결재를 받아서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서울중앙지검관계자는 "임 검사가 상급자의 결재를 받아서 무죄를 구형했다"고 말했다.
- 검찰이 무죄를 구형하는 건 이례적인 것 아닌가?
= 그렇다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검사가 기소독점권을 갖고 있는데 기소를 해놓고 무죄를 구형하는 건 자기부정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자주 있어서도 될 일은 아니다.
재판을 다시 하는 재심사건은 주로 시국관련 사건에서 볼 수 있는데 재심사건에서 무죄 구형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내에서는 ''무죄구형이 있었다고 하더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어서 이전 사례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 검찰의 한 고위관계자도 처음에는 "무죄구형이 종종 있었다"라고 답변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사례가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주로 검찰에서는 재심사건에서도 ''법과 원칙에 따라 판결해 달라''고 논고를 하고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하는 그런 형식이었던 것이다.
임은정 검사도 이 사건 구형을 앞두고 이전 사례가 있었는지 찾아봤지만 ''설''만 무성했지찾지 못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가끔 있다고 한다. 검찰의 한 중견간부는 "지방검찰청 근무 당시 기소를 했다가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나와 공소취소를 하지 않고 무죄를 구형한 전례가 있다."고 말했다.
대검찰청 예규에 수사. 공소심의위원회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각 검찰청마다 위원회를 설치해서 중요사건이나 무죄 등과 관련된 사건을 심의하도록 하고 있다.
검찰의 고위간부는 "고문에 의한 것이 명백하고 그것이 유일한 증거일 경우 검찰이 공익의 대표자로서 무죄를 구형하거나 유죄를 구형하지 않고 재판부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구형을 한다."라고 말했다.
- 임은정 검사는 ''도가니 검사''로 잘 알려졌지 않나?
= 그렇다. 임은정 검사가 유명세를 탄 사건이 ''도가니 사건''과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이른바 ''타진요'' 사건 두 가지다.
임 검사가 광주인화학교의 성폭행 사건을 1심 공판을 맡았는데 2009년 공지영씨의 소설 ''도가니''를 읽은 뒤 소회를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올렸다.
뒷부분만 인용하면 "정신이 버쩍 든다. 내가 싸워주어야 할 사회적 약자들의 절박한 아우성이 밀려든다. 그날 법정에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말려가며 한 다짐을 내 가슴에 새긴다. 정의를 바로 잡는 것, 저들을 대신해서 세상에 소리쳐주는 것, 난 대한민국 검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년 뒤인 2011년 9월 30일 일기에는 영화 ''도가니''를 본 뒤의 소감과 느낌을 남겼다.
"기어이 친구들과 도가니를 봤다. 현장검증에서 본 화장실... 이런 좁은 화장실에서 어떻게 성폭행을 하겠느냐며 슬쩍 판사를 떠 보던 변호사의 목소리...
(중략)
그래... 잊지 않았다.. 있을 수 없으니까.. 지금 이 사회는 분노의 도가니가 되었다..그래 이래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 선생처럼 내 아이의, 내 이웃의, 다른 사람의 고통에눈 감지 않고 아우성에 귀 막지 않고... (이하 하략)..."
임 검사는 법무부에 근무하다 올 2월 서울중앙지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다이어리에 심경과 검사로서의 다짐을 기록하고 있다. 임 검사는 "일선검사로 다시 신임으로 돌아갔던 두렵고 설레인다"며 나름대로의 각오를 기도문으로 표현했다.
<최선을 다해 주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고통 받는 피해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 되겠습니다. 비뚤어진 영혼이 돌아설 수 있도록 다독이는 따뜻한 손길이 되겠습니다. 잔인한 정의가 아니라 따뜻한 정의가 실현되도록 마음과 능력을 다하겠습니다.
지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조금은 덜 지치고 지치더라도 다시 기운 낼 수 있도록 주님 지켜주세요>
임 검사는 역사와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미니홈피에 ''맹자''와 ''정관정요'', ''자치통감'', 등의 고전과 안도현의 시 등 여러 시를 소개하고 있다. 왕릉기행 등 여행을 좋아한다고 한다. 임 검사의 지인들은 "감성이 풍부한 시인 같은 검사"라고 평한다.
= 박형규 목사가 지난주 금요일 14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서 "나는 재심이 되는지 안 되는지 잘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재심을 하겠다고 그것도 또 재미있는 거는 검사가 무죄라는 걸 말을 하고 재판장이 그걸 받아서 무죄 선고를 한 거예요"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이어 "놀랐어요. 검사가 여자 분인데 검사가 무죄를 구형한다는 게 또 이게 없던 일이거든요"라고 당시 심경을 피력했다.
민청학력 사건과 관련해 박형규 목사를 비롯해 윤보선 전대통령, 지학순 주교,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등도 긴급조치 제4호 위반과 내란선동 혐의로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의 죄목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기 때문에 10개월이 채 못 되어 전원 석방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던 민주통합당 유인태 의원과 이철 전 의원, 김지하 시인 등을 비롯해 45명이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 [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事件] |
| 1974년 4월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적 인민혁명''을 수행하려 했다는 이유로 반정부 학생 및 일부 사회 인사들을 처벌했던 사건. 정동의.하재완.서도원.도예종.여정남 등이 배후 조정인물로, 이철.정문화.김병곤.나병식 등이 행동책으로 발표된 이 사건은 ''민청학련사건''으로 불린다. 1972년 유신체제가 수립된 후 제4공화국의 권위주의적 통치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는 반대나 비판이 억압되었고 사회적으로도 침묵이 강요되었다. 1973년 겨울 이전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던 학생들은 같은 해 겨울방학 동안 1974년을 ''민권쟁취. 민주승리의 해''로 정하고 학생운동을 보다 질적으로 심화시킬 방법과 조직적인 운동을 모색했다. 이러한 모색들은 1974년 들어서면서 각 대학 및 고등학교에서 성토대회.수강거부.유인물배포.농성 등의 사태로 나타났다. 이에 제4공화국 정부는 같은 해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하면서 이 사건을 발표했다. 그리고 배후세력을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로 지목하여 이 사건을 간첩사건과 연계시키려 했다. 사건 관련자로 조사받은 사람만도 1,024명에 달하며 최종적으로 사형 7명과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 등 관련자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사건의 진위 여부가 문제되기 시작했고, 수사과정에서의 고문행위들이 폭로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따라 ''국가정보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약칭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여 2005년 12월 그 결과를 발표했다. 진실위는 이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시위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출처 - 브리태니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