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 주간 가장 이슈가 되었던 인물은 고 장준하 선생. 오늘 기자수첩은 정치적 이슈에 가려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 박정희-장준하, 장준하-박정희 두 인물이 연결된 ''새마을운동''을 살펴보자.
◇한반도 민족계몽운동 50년 史
1919년 3·1운동을 경험한 우리 민족은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대한 경험을 통해 무언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열기 속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로 떠나기도 하지만 한반도 내부에서도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 가운데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v-narod)운동도 있었다.
농촌에서 못 배웠고 가난하다면 배우고 땀 흘려 벗어나면 될 것 아니냐는 의식개혁운동인 셈이다. 그래서 문맹퇴치와 빈곤타파를 목표로 야학과 공동경작회 등이 만들어졌다. 1930년대 초반 심훈의 ''상록수''가 탄생한 배경이 바로 브나로드 운동이다.
''브나로드''(vnarod)''란 러시아 말로 ''민중속으로''라는 뜻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청년학생들이 전개한 농촌운동이다. 이것을 모델로 해 1931년 동아일보사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며 전파됐다.
동아일보가 시작할 때는 브나로드 운동이었고, 1933년에 계몽운동이라 이름을 바꿨다. 그 때 만들어진 조직이 계몽대이다. 오늘날의 고교생과 대학생인 고보(高普) 4·5학년과 전문학교 학생으로 구성되어 각 지방에 나아가 한글·산술을 가르치고 보건위생 교육, 문화소양 등을 지도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1931년~1934년까지 계몽대원 수가 5,750명, 강습활동 지역이 1,320개에 이르렀다.
경쟁지인 조선일보는 문자보급운동이라는 문맹퇴치운동을 시작했다. 1929년 여름부터 1934년까지 6년간 실시했다. 조선어학회에서도 1931년에 전국순회 조선어강습회를 여는 등 민족계몽운동에 불이 붙었다.
민족의식의 고취와 계몽운동을 일본 총독부가 그냥 둘 리 없다. 총독부는 농촌의 게으름과 낭비를 몰아내고 근대화한다며 농촌진흥운동이란 것을 관주도로 펼쳐가기 시작했다. 근검절약, 근면성실을 강조한 일제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은 1932년 7월부터 1940년 겨울까지 진행됐다.
역시 마을회관(공회당) 건립, 금주금연운동, 절미운동, 가마니 짜기, 공동경작, 빚 갚기 등이 운동의 내용이다. 문제는 조선 농촌의 가난과 고통이 식민체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농민들의 무지와 게으름에 원인이 있다고 몰아간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농촌진흥운동과 충돌하는 동아일보·조선일보의 민족계몽운동은 1934년을 끝으로 총독부 경무국의 명령에 의해 강제 중단시켰다.
이 점과 관련해 새마을 운동을 유심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노출된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도시와 공업에 집중되면서 농촌의 빈곤과 낙후성이 문제로 떠오르자 군사 정권은 농민들의 게으름과 무기력, 협동정신 부족이 원인이라며 근면·자조·협동 등 정신개조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정책의 편향과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을 거론하지 않고 ''국민의 문제이고 책임''이라 몰고 가는 것이 관주도의 계몽운동이 갖는 특징이자 한계라 할 수 있다.
◇장준하, 국민정신혁명사업의 전면에 나서다
해방 후 6.25 전쟁을 치른 뒤 나라가 혼란스러운 중에도 1950년대 후반 들어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무너진 농촌사회를 일으켜 세우자는 자발적인 농촌운동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애향청년회라는 농촌계몽조직도 있었고 야학과 미신·도박 추방운동, 농업협동조합 설립도 있었다.
4.19로 들어선 장면 정권은 국민계몽운동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가고자 했다. 장면 정부는 정권이 자리를 잡자 곧바로 경제발전 계획을 짰다. 그 때 내건 표어가 ''경제 제 1 주의'', ''1961년은 경제건설 출발의 해''였다. 그 계획 중 하나가 농촌개발을 중심으로 한 국토개발기획단 사업. 그 단장을 장준하 선생이 맡았다.
장면 정부의 경제정책 골자가 첫째, ''국민정신의 혁명을 위한 국토건설사업의 시행'', 둘째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 시행''이었으니 이것만 봐도 장면 정부가 국토건설사업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국토건설 사업의 핵심에 대해 장준하 선생은 서울대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국민 여론에 의한 국민운동의 전개 △국가의 이익에 부합 △원조물자를 낭비하지 말고 재생산에 써 자손에게 이득이 돌아가게 하자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업을 우선적으로 만들어 집중하자.
그리고 ''국토건설대''를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엘리트인 대학 졸업자들을 대거 기용해 사무직 1,600명, 기술직 450명으로 ''건설대''를 만들고 교육을 시킨 뒤 국토건설 현장 지휘 감독을 맡겼다. 기존 공무원의 의식으로는 새 국토건설이 어렵다고 보고 4.19의 주역인 젊은 세대를 가능한 많이 참여 시킨 것이 특징이다. 1930년 대 브나로드나 농촌계몽 민족운동에서 조직했던 계몽대 조직을 참고로 해 만들어 낸 것이다. 장준하 선생이 이 젊은이들과 함께 야근을 하며 빵으로 저녁끼니를 대신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국토개발기획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서려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벌어졌고 모든 정책과 사업은 중단되었다. 기습적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세력이 정권의 정통성 보강 작업이 시급한 마당에 대대적인 국토개발과 국민계몽사업을 펼칠 리 없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만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바꿔 도시화와 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국토개발기획사업은 폐기처분했다.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직속기관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두고 군부의 개혁의지를 국민에게 선전하는 강력한 관주도의 국민동원운동을 전개했다. 마을·직장·학교를 대상으로 정신훈화 교육과 향토개발운동 등을 주관한 재건국민운동은 별 성과 없이 조직개편을 거듭하다 훗날 새마을운동에 흡수통합되었다.
이렇게 정권의 정통성 강화와 대국민 선전, 도시화와 공업화에 몰두하다보니 1970년대에 접어들며 방치되었던 농촌개발과 식량문제가 현실 과제로 대두됐다. 그리고 10월 유신이라는 장기집권의 토대를 위해 새로운 국민의식운동이 필요했다. ''새마을 운동''은 그렇게 등장한다.
정리를 해 보면 일제 강점기에 민족운동으로 시작된 농촌계몽운동이 4.19의 힘을 받아 장준하 선생의 국토건설사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5.16 군사정권은 장면 정부의 이 거국적 사업을 폐기해버렸다가 10년이 지난 뒤 이를 적당히 짜깁기해 새마을운동이란 모방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을 10년 뒤에 리바이벌 시켰다고 해야 할까? 다른 각도에서 보면 1960년에 이미 시작돼 궤도에 오르려는 새마을 운동을 정치적·정략적 이유로 10년을 지연시켰다는 해석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