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직자 선거 개입의 모범 케이스, 67년 6월 총선!
1967년 6월 총선거, 이 선거는 고위공직자 선거개입과 중립성 시비를 불러일으킨 선거이다. 박정희 정권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장관, 차관이 특정후보 지지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선거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후 지방 순회시찰에 나서 수원 가서는 관광도시 개발, 천안에는 공장 건설을 약속하고, 목포로 가서 장관들을 불러 모은 뒤 현장에서 경제장관회의를 열고 호남 푸대접 시정방안을 논의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지방 선심공약 남발의 시초가 된 선거이다. 주로 다리, 아스팔트, 공장지어 취업 등의 약속이 남발됐다.
이번 4·11 총선에서도 기획재정부가 지난 5일 각 정당의 복지공약을 평가해 발표했다가 공직선거법 9조(중립의무) 위반이라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중앙선관위가 중립 의무 위반이니 그런 내용을 발표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밀어 붙여 발표해 버린 것.
고용부도 4·11 총선을 40여일 앞둔 지난 2월28일 근로복지공단·산업인력관리공단 등 10여개 산하기관에 지침을 내려 보내 선거 기간 업무철저, 공직자 투표 권유 및 정당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기강교육을 철저히 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공공법인의 노동자들은 헌법에 따라 정치적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공직기강를 핑계로 헌법에 보장된 공기관 직원의 비판적 정치활동 자유까지 은근히 눌러버린 셈이다.
지난 17일 인천을 방문한 권도엽 국토부 장관도 새누리당 후보와 경인아라뱃길 구간인 인천터미널에서 김포터미널까지 자전거를 타고 면담하면서 이 후보를 홍보하는 발언을 했고 이 후보가 이 발언을 선거 홍보자료에 활용해 말썽을 빚었다. 이런 풍토가 67년 6월 총선에서 비롯된 것.
이 때문에 전국민 규탄시위가 벌어졌고 부정선거에 연루된 여당인 공화당 당선자 7명 제명 처분, 국무위원 일괄사표 제출 등이 이어졌다. 또 6개월 간 정국이 파행됐다. 이걸 덮으면서 터진 것이 이른 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후 투표.개표 과정의 부정이 위축되고 언론을 동원한 색깔론, 북한 남침론, 공안정국, 관광버스 등의 새로운 기법이 선거정국을 이끌어 갔다.
그래서 1971년 대선에서는 권력과 언론이 유착한 관권 선거가 본격화됐다. 1971년 4월 10일, 박정희 후보는 대전에서 5만 명을 모아 놓고 유세를 펼쳤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유세하는데 16만 명이 모인다. 4월 18일 장충단에서는 무려 30만을 모아 세를 과시했다.
박정희 후보가 결정적 한 방을 날린다. ''''난 정말 이번만 대통령하고 다시는 안 한다'''' 이 선언을 언론이 과대 포장해 대인배의 풍모라고 선전했다. 여기에 맞서 김대중 후보는 정권이 총통제를 구상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KBS는 김대중 후보 연설을 내보내면서 그 앞과 뒤에 6.25 전쟁 모습과 경제발전 내용을 설명하는 프로그램을 편성해 물타기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번 총선에도 보수신문과 방송사들은 총선 보도 뒤에 북한 미사일 보도, 북한 미사일 보도 뒤에 총선 보도를 이어내면서 반공과 전쟁 위험 프레임 속으로 선거를 끌고 갔다. 방송들은 철저히 여당에 기울었고 인터넷 언론 일부와 SNS에서 야권연대를 지지하며 맞서는 양상이 빚어졌다.
그렇게 71년 대선에서 우여곡절 끝에 94만 표 차이로 간신히 이긴 박정희 정권은 이후 유신체제로 아예 영구 집권에 들어갔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뽑고 국회의원 1/3을 뽑도록 헌법을 개정한 것. 이때부터 체육관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전두환 정권에 들어서서는 대통령이야 체육관에서 나홀로 선거하면 문제가 없고 유정회 국회의원을 다시 만들기는 부담스러우니 여당이 흘러간 인물들로 야당을 만들어 들러리를 세운다. 민한당, 국민당 등 군부정권이 지원해 만든 야당을 1중대 2중대 3중대라고 불렀다.
◈ 묻지마 투표로 추락한 2007년 대선
한국 선거 역사에서 유권자가 가장 부끄러운 선거라면 과거 고무신 막걸리 관광버스 선거 행태들도 있었지만 2007년 대통령선거가 가장 부끄러운 선거로 꼽힌다.
서울역에서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유세를 펼 때 모인 사람이 기껏 5천 명이었다. 텔레비전 토론이 후보를 제대로 검증해 내지 못했고 시청률도 저조했다.
다수의 유권자들이 21세기에 접어들었는데도 그저 경제를 살리겠다, 주가지수 올리겠다, 여기 저기 개발해주겠다라는 약속에 현혹돼 경제 대통령만 원했다. 그거 하나로 역대 최다의 도덕성 시비, 의혹 시비를 모두 덮어버리고 표를 찍었던 선거. 민주 시민의식과 유권자의 분별력, 도덕성 모두 후퇴한 선거였다고 평가 받는다.
2007 대선과 비교하자면 이번 총선은 여당에 대한 견제, 맘 편히 믿어주기 어려운 제 1야당에 대한 경계, 진보 정당에 대한 조심스런 기대가 골고루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 확실한 변화의 계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에는 크게 못 미쳤지만 현실적인 판단들이 고루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