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의 주요 인물을 따와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낸 가비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김소연)와 그녀의 연인 일리치(주진모), 커피애호가 고종(박희순) 그리고 세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유선)을 중심으로 커피와 고종암살작전의 비밀을 그렸다. 참고로 가비란 커피의 영어발음을 따서 부른 고어다.
가비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 시기인 1896년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사이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이에 극중 고종은 고증에 따라 상복에 해당하는 백색곤룡포를 착용했다. 또 실제 역사적 인물로 아관파천을 주도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 이후 나라잃은 슬픔을 자결로 대신한 문신 민영환 등이 나온다.
러시아에서 집시처럼 살던 따냐와 일리치는 어느날 고종암살작전인 일명 가비작전을 계획한 사다코의 음모에 휘말린다.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커피에 박식한 따냐는 목숨을 담보로 고종을 위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가 된다. 일리치는 가비작전에 휘말린 따냐를 지키고자 사다코의 곁에서 잔인한 일본군으로 거듭난다.
가비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러일간 대립관계 등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어야 좀 더 흥미롭게 볼 수 있다. 일례로 따냐에게 내려진 첫 임무는 러시아를 방문한 민영환에게 접근해 마음을 사는 것이다. 실제로 민영환은 1986년 고종의 특명을 받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또한 가비는 고종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나약하고 침울하고 우유부단했던 고종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나라잃은 왕으로서의 슬픔과 치욕, 무력감, 외로움 등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또한 격변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움직인 현명한 왕의 이미지를 추가로 보여준다.
때문에 네 인물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중에서 따냐와 고종이 서로 충돌하고 동화되는 부분이 가장 흥미롭다. 두사람이 주고받는 대사 등에서는 서양문물이 유입된 당시의 격변하는 시대상이 엿보인다. 고종의 복잡한 내면도 둘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처음 고종은 따냐가 궁녀들과 달리 서양복식 차림으로 커피를 따라주는 행동에 모멸감을 느끼는데 따냐는 이에 자신은 궁녀가 아니고 바리스타라고 답한다. 왕의 시대가 거의 끝나감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종은 따냐에게 자신이 왜 커피를 좋아하는지 말해주는데 이는 고종의 당시 씁쓸한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박희순은 대사의 뉘앙스나 표정만으로 고종의 내적갈등을 꽤나 깊이있게 표현했다.
최근 노컷뉴스와 만난 김소연은 두 남녀의 멜로에 대해 "영화 ''화양연화''를 볼때 느낀 그런 아련한 분위기가 있다"고 귀띔했는데 이 장면을 두고 한말이 아닌가 싶다. 사다코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조국을 버린 흥미로운 캐릭터나 실상은 두 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친다.
유선은 인상적인 표정연기를 간혹 보여주나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 자체에 한계가 따른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러시아 장면은 제작비 문제로 로케가 불발된 제작진의 아쉬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15세 관람가, 1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