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경제인으로 변신해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돼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다.
1960년 후반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 경험은 물론 부존자원마저 없어 제철소의 건설은 요원해보였지만, 박 명예회장의 뚝심으로 1968년 4월 대한중석을 모태로 해 설립자본금 4억원으로 포항제철이 설립됐다.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을 비롯한 포스코맨들은 온갖 역경을 딛고 1973년 7월 3일 영일만에 조강기준 연산 103만톤 규모의 포항제철소를 준공할 수 있었다.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생존 전략은 중화학공업 육성과 대외 수출 진흥이었으며 이러한 전략의 성공 여부는 철강산업의 발전에 달려 있었다.
포스코는 조업 개시 이래 품질 좋은 철강재를 공급함으로써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주요 관련 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이후 1987년 5월 조강기준 연산 270만톤 규모의 광양 제1기 제철소를 건설했다. 박 명예회장은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 4위(지난해 조강생산 기준, 3,370만톤)의 철강업체로 키워내 ''한국의 철강왕'', ''한국의 카네기''로 불린다.
박 명예회장은 1992년 10월 포철 회장직에서 임기 중 물러난 뒤 2002년 6월부터 포스코 명예회장으로 재직해 왔다.
포항제철은 지난 2000년 10월에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36%가 모두 매각되면서 완전히 민영화되었으며, 2002년 3월에 포항제철은 포스코로 상호가 변경됐다.
박 명예회장은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에 취임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32대 국무총리(2천년 1월~2천년 5월)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산학연 연구개발체제로서 산업계 전반에 새로운 기술개발 모델이 됐고, 현재 포스코가 전세계 철강업계의 기술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으며, 포스텍은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다. 1971년에는 제철장학회를 설립해 임직원 자녀들의 교육 지원을 비롯해 지역사회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사업의 기반을 만들고, 이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12개 학교를 세워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사학으로 육성했다.
제철장학회는 포스코 청암재단으로 확대 재편돼, 아시아권을 대상으로 하는 권위있는 복지장학문화 재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청암재단은 지난 2006년 포스코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태준 명예회장의 업적을 기리고 포스코 창업 이념인 창의 존중, 인재 육성, 희생·봉사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해 포스코청암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박 명예회장은 해마다 청암(靑巖)상을 수여하는데 참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