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호 의원이 법원 판결문을 인용해 "일본의 노무자 강제동원은 1944년 8월 국민징용령이 적용된 이후로 보아야 하니 박원순 후보의 조부가 1941년에 징용영장을 받아 끌려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등은 "신지호 의원이 이끈 뉴라이트 연합의 교과서에도 1938년부터 강제징용이 시작됐다고 되어 있다. 신지호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도 1938년 4월부터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에서도 모두 강제동원 피해자로 규정하는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며 역공을 펴고 있다.
◇ 초기 모집알선은 무늬만 자발(自發)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준전시 상태'' 단계로 국가를 통치했다. 이후 전쟁이 확대되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면서 1938년 5월부터 본격적인 전시상태로 돌입했다. 이때부터 일본과 한국에 있는 모든 인력과 물자를 공권력을 동원해 면밀히 조사파악한 뒤 통제 및 공출에 들어갔다. 일본은 인력 동원에 대해서도 ''조선인 공''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지역으로는 일본 국내 동원과 국외동원으로 나눌 수 있고 동원 형태로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모집 2) 관알선 3) 징용 3) 기타 보국대, 봉사대, 청년단
1) 모집 - 1939년 7월 ''조선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에 따른 동원. 기업주가 모집 신청을 내면 조선총독부가 허가하고, 기업주가 모집 공고를 내 모여드는 조선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방식.
2) 관알선 - 1940년 조선총독부 ''조선인내지이입알선요강''에 따른 동원. 기업체나 노동자 송출대행업체가 필요한 인원을 신청하면 조선총독부가 모집 지역과 규모를 정해 각 시도읍면 및 경찰, 조선노무협회 등에 할당량을 통고하고 해당 기관들이 나서 사람을 모집하는 방식.
- 왜 처음부터 모두 강제로 끌고 가지 않고 단계적으로 진행했을까? 그것은 상황의 급박함 정도와도 연관 있지만 책임 소재의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가 직접 노동자를 공출할 경우 모집과 분류, 수송, 수용, 급식, 피복, 임금, 산재보상 등 모든 문제가 국가 책임이고 관장할 부서와 행정인원도 부족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부담을 기업체에 떠넘기려는 술책이었다.
3) 징용 - ''국민징용령''에 따른 강제동원이다. 1939년에 특정 기술자부터 적용해 동원하다가 1,2,3차 개정을 통해 범위를 확대(제철조선기술자, 의사, 간호사 등) 했고, 1943년 9월 이후는 노무자로서 동원에 응하는 것은 의무이자 명예라고 강조하면서 모든 국민에 해당되었다. 1944년 4차 개정 이후는 아예 호적명부에 따른 무차별 동원의 형태를 띤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패배가 이어지며 일본 본토로 전장이 옮겨지려는 시점이어서 국가책임, 국가체면 등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 중 몇 개를 읽어보자.
▲성봉제 할아버지 - 15살이던 1940년 10월, 거리를 돌아다니다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여관에 하루 감금당한 뒤 다음날 일본행. 해군기지 건설현장에서 일함. (본인이 군속신분이었는지 일반 노무자였는지 아직도 알 수 없음).
▲김임용 할아버지 - 20살이던 1942년 면장이 보통학교 졸업생들을 모아 인원을 채우라고 구장(이장)들에게 지시, 30명 쯤 모이자 포로감시원(군속 신분)으로 일하러 가라며 실어 보냄. "강제로 모이라케놓고 모집이라카대" (면장 동생은 중간에 살며시 빼내 집으로 돌려보냄)
▲장창권 할아버지 - 13살이던 1943년 학교에서 담임이 황국신민으로서 동원에 참여해야 하는데 급장이 솔선수범하라고 위압적으로 권해서 동무 4명이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찍어 지원서를 만들고 동원됨.
▲장덕환 할아버지 - 18살이던 1943년 구장으로부터 아버지에게 징용장이 나왔는데 아버지는 농사지어야 하니 네가 대신 가라는 편지가 날아와 동원됨. 일본인 인솔자가 너무 어리다고 빼려 했으나 면장이 할당인원 못 채운다고 떠밀어 보냄.
▲박용식 할아버지 - 17살이던 1944년 1월 집에서 가마니를 짜고 있는데 마을회관으로 모이라 해 갔다가 그 자리에서 일본 탄광으로 끌려 감.
▲양승우 할아버지 - 21살이던 1944년 8월, 면 직원이 징용장을 갖고 와 동원, 당시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있었으나 소용없었음.
◇ 뭐든 흔들면 그게 징용장
이처럼 모집, 알선, 징용이라는 법령 상의 단계와 전혀 상관없이 현장에서는 강제적인 편법들이 횡행했다. 모집이 계속되자 마을에서 복불복 제비뽑기로 대상자를 뽑기도 했고, 대상자들이 도망치자 마을을 수색해 아이와 노인만 아니면 끌고 가 머리수를 채운 사례가 많다. 대를 이을 장남 대신 차남, 삼남을 끌고 가거나 가계를 책임 질 아버지 대신 어린 아들이 끌려가는 사례도 역시 많다.
가족 전체가 피신한 사례들도 있다. 관련 법령으론 모집.알선이지만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가 지방행정 조직인 도지사, 군수, 읍장, 면장, 경찰서장, 그리고 학교장까지 체계적으로 동원해 인원 채우기에 나선 것 그 자체가 강제동원, 징용임을 확인시켜준다. 더구나 일선 관리들에게는 모집도 알선도 행정명령이자 자기 실적이어서 강제력을 동원한 것이 명백하고, 그 뒤에 이를 획책한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가 있으므로 1938년 이후부터 포괄적인 강제동원, 징용이며 모집-알선-징용은 형식상의 경로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강제동원에 쓰였다는 징용장(징용 徵用의 徵이란 글자에 이미 강제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 문제를 살펴보자. 사례에서 살폈듯이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징용장과 관련해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다.
△징용장을 보인다 해도 한자로 기록된 영장을 읽어낼 노동자, 농민이 별로 없어 일일이 전달하지 않았다. △징용장이 없지만 다른 관련 문서(지역별 할당 공문, 전체 대상자 명부)만 흔들어 보이고 압박하면 그걸 징용장으로 알고 끌려갔다. 3△모집,알선이어서 자기결정권과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면 귀찮아 지니 징용영장이 나온 것처럼 기만했다.
이 어떤 경우든 강제동원된 당사자와 가족들은 징용장이 나와 끌려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례가 많을 것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 내용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한일청구권협상에서 가장 답답한 문제도 바로 일본 측이 ''입증자료를 제시해보라'', ''징용영장도 없던 시절에 무슨 강제동원인가'', ''고로 1944년 징용 실시 이전은 강제동원 노무자로 인정할 수가 없다''는 억지였다.
한 관계자는 "지금도 일본 정부 품안에 있는 입증자료를 내놓을 수 없어 이것이 아픔이자 발목을 잡는 굴레였다"고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결국 신지호 의원의 ''자발적 징용'' 발언은 일본이 주장하고 고대하던 식민사관 발언인 셈이다. 그 뿐인가. 징용장 없이 끌려갔다 간신히 살아 돌아와 보상을 받은 사람들과 유가족은 신지호 의원 말대로라면 강제동원 아닌 돈 벌러 자발적으로 갔으면서 강제로 끌려갔다하고 보상을 받은 부정수급자란 말인가? 또 민족이 입은 피해를 밝혀내기 위해 일본 현장을 오가며 탐문조사를 하고 서류창고와 도서관을 뒤지며 몸부림친 학자들로서는 피를 토할 일이다.
''부산고등법원의 판결(사건번호 2007나 4288)''은 징용영장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자료나 끌고 간 당사자의 증언이 없는 한 어쩔 수 없는, 증거주의에 의해 판정해야 하는 법의 한계로 봐야지 역사적 진실로 여기는 것은 큰 착오이다.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 정치학 박사라는 출신에서 오는 식민사관인지, 선거에서 이기려고 또 음주방송 실수를 만회하려고 기를 쓰다 보니 실수를 한 것인지 본인의 답을 들어보고 싶다.
차라리 폭탄주를 마시고 발언했다면 실수라고 정상참작이라도 하겠다. 그런데 말짱한 맨 정신으로 발표한 것이니 더 당혹스럽다. 100분 토론 방송 전엔 물을 마셨어야 하고, 이번에 술을 마셨더라면 그나마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텐데. 술과 물이 순서가 바뀌고 말았다. 술과 물 순서 바뀐 게 아마 정치적 운명도 바꿔 놓을 공산이 커 보이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