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시작돼 우리 국군이 북의 기습으로 후퇴했다 다시 북진하던 중 중공군에 막혀 버렸다. 이 때 병력 보충을 위해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제정되었다. 만 17세 ~ 40세까지 남성 중 현역 경찰,군인,학생을 뺀 모두를 제 2국민병으로 하고 이 가운데 자원병을 모집한다는 사실상 국민총동원령이었다.
병력을 채울 50만 명을 모집하기로 하고 이승만 대통령 친위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 김윤근에게 별 하나를 달아주고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김윤근은 씨름선수 출신으로 군대 경험이 전혀 없다. 대신 국방장관 신승모의 사위이다. 그 밑에 고급 장교들도 대한청년단 간부들이 대령, 중령 계급장을 얻어 달고 행세했다.
젊은이들이 국민방위군으로 모여들고 부대 창설 작업을 벌이는 중에 중공군 대공세로 1.4 후퇴가 시작됐다. 국민방위군 병정들은 대구, 부산 등 남쪽으로 이동해 남쪽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예산 편성도 늦은데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군수품과 예산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고급장교와 대한청년단 간부들은 빼돌린 돈과 보급품으로 자기들 배를 불리고 상관에게 뇌물을 바치고 정치권에 자금을 대며 출세에 골몰했다.
▣ 죽음의 행군, 해골의 행군이 시작되다
서울에 집결한 50만 병정은 겨울 추위를 뚫고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먹을 것도 잘 곳도 겨울 피복도 군복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병정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석 달 사이에 아사 내지는 동사한 방위군 병정이 5만 명이라고 전해진다.
계획상으로는 후방에 50여개의 국민방위군 교육대가 설치되어 이들을 수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준비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들을 훈련시킬 현역장병도 없었고 부패한 대한청년단 간부들이 이들을 맞았다. 이 때 유행한 것이 그 유명한 ''''돌려차기'''' 수법이다. 경북 김해로 가라해 간신히 도착하니 여기가 아니라며 경남 진주 교육대로 가라했다. 진주로 가니 마산으로 가라며 계속 걸으라 했다.
그러나 김해도 진주도 서류상으로는 자기네가 수십만 명의 국민방위군 병정들을 며칠 씩 재우고 먹여 다음 장소로 보낸 것으로 꾸민 뒤 예산과 식량을 빼돌렸다. 또 행군하며 먹기 좋은 간이식량 생산 공장을 짓는다고 허위 서류를 꾸미고 돈을 빼냈다. 계속해 굶어죽고 얼어 죽고 일부는 대열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간부들에게 돈을 찔러주면 슬그머니 대열에서 빼주기도 했다.
나머지는 훈련소에 포로처럼 갇혔다. 가끔 훈련한다고 풀어주면 민가에 가 얻어먹거나 훔쳐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이들의 행군을 일러 죽음의 행렬이라 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골의 행군''''이라고도 불렀다.
▣ 6.25 전쟁 중에 빼돌린 국방비가 50 억 원?!
1951년 1월 15일, 야당 국회의원들에 의해 진상이 폭로되고 국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국방장관 사위이자 대한청년단장이자 이등병 경험도 없는 사령관 김윤근은 ''''불순분자와 제5열의 책동''''이라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사건의 진상을 서둘러 축소조작하고 군사재판을 열어 사령관 김윤근은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은 징역 3년6월을 선고하고 황급히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민심이 들끓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거창 양민학살 사건 책임까지 묶어 국방장관 신성모 등을 해임하고 이기붕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부통령 이기붕이 이때 뜨기 시작한 것. 이승만 대통령은 이것으로 마무리 지으라 지시하며 국민방위군 사건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진상조사위 위원들이 반발하며 진상을 발표했다.
1950년 12월부터 단 석 달 사이에 유령인구 조작으로 착복한 현금이 23억 원, 쌀 2천 섬. 훈련소가 서류를 조작하여 빼돌린 금액이 20억 원에 이르러 55억 원이 착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국회 내 어떤 정파로 흘러 들어간 것이 1억 원, 그 돈이 야당에게 갔겠나?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군법회의를 4월에, 다시 고등군사법정을 7월에 열어 속전속결로 재판을 끝냈다. 사령관, 부사령관 등에게 사형이 언도됐다. 이어 한 달 만에 총살형을 집행했다. 정치권에 흘러 들어간 뇌물은 밝혀질 틈도 없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시영 부통령은 도저히 견디지 못해 국회가 이 엄청난 비리를 꼭 밝혀달라며 부통령직을 던지고 떠났다.
▣ 군번 없이 전쟁 중 숨진 병사가 10만?!
군인 명부에도 없고, 군번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복도 입지 못한 국민 방위군 - 그러나 대한민국 군인 중 가장 길고 험한 행군을 치른 국민 방위군은 가장 처참한 희생을 치렀다.
이승만 정부 발표로는 1,234명 사망, 그러나 민간 집계로는 8만에서 10만 또는 9만에서 12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지난해 밝힌 조사내용도 5만에서 8만 명 정도 숨졌을 거라고 막연히 추산하고 끝난다. 아직도 진상이 묻힌 채로다.
견디다 못해 숨지면 길가에 묻고, 훈련소 주변 야산에 묻고, 공동묘지가 근처에 있으면 적당히 묻고, 유가족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몇 년 전 모 대학 명예교수가 자신의 국민방위군 체험을 대학동창회보에 실어 화제가 됐다.
겨우 겨우 살아남아 제주도로 이동해 서귀포 초등학교에 수용됐다고 한다.
''''우물가 시궁창에 버려진 밥풀 하나하나를 닭이 쪼아 먹듯 삼켰다. 채소밭 옆을 지날 땐 인분을 잔뜩 뿌린 곳이었어도 뛰어들어가 당근이나 마늘을 뽑아서 씻지도 않고 마구 먹기도 했다. 커다란 국통에 담긴 고사리 한 조각이라도 더 건져 먹으려 아비규환이 연출됐다. 썩은 고구마 조각도 집어 먹고 소나무 껍질도 벗겨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군번도 없이 굶어 죽어 한라산에 묻힌 장정들을 생각하면 살아남은 것이 죄스럽다''''
▣ 당신들 묻힌 곳만 현충원이 아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년 전인 지난해 여름, 국민방위군 사건의 피해자 유해 매장지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국가는 희생자들에 대해 정확한 진상을 조사하고, 위령제 등 마땅한 조치를 취하고,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예우를 하라''''고 권고했다. 사건 60년 만에 이뤄진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지금껏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위령제도 없었다. 예우에 대한 어떤 조치도 시작하지 않고 있다. 국가의 정통성과 국격은 이래서 희미해지는 것이다.
미국에선 지난 3월 15일 110세 나이로 숨진 프랭크 버클스라는 참전용사의 장례식이 열렸다. 16살 나이에 군에 입대해 1년 정도 앰블런스 운전병으로 복무하다 상병으로 제대했다. 내놓을 만한 경력은 아무 것도 없고 이게 전부이다. 그러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이 조문하고 온 나라에 조기가 내걸렸다. 계급은 예비역 상병이지만 당시 육군대원수이자 총사령관 존 퍼싱 장군 옆 자리에 묻혔다.
아무 공도 세우지 않은 병사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이것은 조국을 위해 희생한 모든 용사를 향한 국가와 국민의 경의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국가의 정통성은 이렇게 형상화되어 국민이 가슴에 새겨지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세운지 200년이 조금 넘어 역사와 전통이 짧은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국가의 정통성과 국격을 높여가는 것이다.
그런데 십만에 이르는 병사를 싸움은커녕 훈련 한 번 안 시키고 길에서 수용소에서 숨지게 한 국가가 사과도 없고 진상조사도 없고 위령제도 없고 이게 국격인가? 그러고도 비자금 조성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죄로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우격다짐으로 국립현충원에 모시는가?
이 나라 땅은 우국지사와 전몰장병들, 국민방위군 사건 희생자들, 노근리·거창 등의 양민학살 사건 희생자들,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들, 민주열사들…자랑스럽게 숨진,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시신으로 덮여 있다.
나라 전체가 고귀한 땅이다. 문제의 몇 몇 사람이 묻힌 그 자리만, 문제의 몇 몇 사람이 묻힐 그 자리만 우리의 현충원이 아니다. 그 자리들만 빼고 모두 우리의 현충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