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은 꺼지지 않고, 노동자가 철탑에 올라야 하는 이유

[변상욱의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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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 5 야당 대표가 어제(3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를 해결하기위해 청문회와 국정감사 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제 공은 다시 한나라당으로 넘어간다. 한나라당도 뭔가 내놓아야지 모른 척 하면 국회 청문회를 무시한 조남호 회장의 해외도피 출장이나 국회 모독행위에 대한 책임이 온전히 한나라당 몫이 될 것이다.

▣ 한나라당, 조중동 - 우리 떨고 있니?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말은 제각각이나 속에 담긴 생각은 같다. 그 속마음은 김형오 의원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정권타도, 정권퇴진을 공공연히 주장하더라. 억수 같은 장대비가 내리는 데도 최대 1만여 명이 모였다. 적어도 이 정권이 싫어서 몰려 온 것만은 사실 아니냐.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제대로 처방을 내놓지 않으면 엄청난 정권적 위기가 올 수 있다."

한진중공업 사태와 희망버스 운동이 길어질 경우 내년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는 마치 촛불집회 한복판에서 총선을 치르는 꼴이 되고 만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조 회장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제는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 신문들도 정권연장의 꿈에 위기를 느끼며 조남호 회장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조남호 회장으로서는 형식적으로라도 청문회를 치르고 넘어가야지 그냥은 넘길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 치를 수 있을까?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이 3일 "조남호 회장님,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지 염라대왕이 아니다. 겁먹지 마세요" 라고 조 회장을 달랬다. 국회는 염라대왕이 아니지만 검찰이 나서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제 2의 촛불정국이 형성되고 정권이 민심의 압박을 받고 여당이 총선에서 버티는 게 어려워지면 도마뱀 꼬리 자르기처럼 조남호 회장을 어느 정도 사법처리해 여권의 체면을 살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모독죄 정도에서 끝나면 좋은데 털다 보니 비자금, 탈세... 이런 게 나오면 어떻게 될까. 부디 깨끗하시길 바란다.

김진숙 씨는 희망버스하고는 관련이 있어도 한진중 사태 해결과는 별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조남호 회장이 법적 교섭당사자인 금속노련 위원장과 만나 해고문제를 매듭지으면 크레인 위의 김진숙 씨는 거기 있으라 해도 내려온다. 정치권에서 자꾸 김진숙 씨를 앞세우는 것은 여당이든 야권이든 정리해고 문제 해결보다 한진중 사태의 정치적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빨리 내려오게 하고 싶으면 빨리 정리해고를 둘러 싼 노사 문제를 풀면 된다.

▣ 이 나라 노동자는 왜 철탑에 올라야 하는가?

자신의 주장과 신념으로 수백일 농성을 벌인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선 보통 일이 되어버렸다.

▲KTX 여승무원들 - 불법편법고용 철폐, 직접고용을 외치며 2006년 3월에 시작해 지난해 2010.8.26 복직소송 승소로 일단락됐다. 탑에 올라가 고공농성, 단식농성, 몸에 쇠사슬 묶고 농성... 1500일, 4년 반을 싸웠다. 아직도 34명은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KTX 측이 항소했기 때문이다. 19일이 항소심 선고공판. 그녀들은 아직도 KTX 승무원 유니폼을 간직한 채 다시 입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재능교육 - 노조 인정과 부당한 강제영업 시정을 내걸고 농성이 시작돼 해고, 구속이 이어지며 지금도 진행 중, 1300일을 넘겼다. 특수고용 노동자를 노동자로 보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인식 때문에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 노조이다.

▲기륭전자 - 노조 분회장 김소연 씨의 2008년 94일 단식으로 세상에 알려진 장기 농성이다. 죽음 직전까지 가는 단식을 포함해 철탑.조명탑 고공농성 등 1,895일 5년여 세월을 싸워 일부 조합원 정규직 복직을 약속받고 농성을 끝냈다. 복직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하는데 믿고 기다려 보자.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싸움을 했던 KTX, 재능교육,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3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 김진숙 위원을 만났다. 그 밖에 지난 3월 대우조선 비정규직 88일 송전탑 농성이 있었고 , 19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크레인 농성,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70미터 굴뚝 고공농성도 있다. 지금까지 고공농성 시위는 100 여건 정도로 추산된다.

▣ 들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

세계 역사 속에서 노동자 최초의 저항과 농성 사건은 무엇일까? 기록으로는 1345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모직공이 노동자 조합을 조직하려다 사형에 처해진 사건이 최초로 등장한다. 몇 년 뒤인 1349년 세계 역사 최초의 노동법이 등장했는데 내용이 기막히다.

"흑사병 이후로 힘들다고 게으름을 많이들 피우는데 강제로라도 노동을 시키고 임금은 동결한다"는 것이 이 최초 노동법의 요지이다. 이런 학정을 견디다 못해 1378년 피렌체 모직공들이 집단적으로 봉기해 노사가 서로 견제하는 체제가 잠시 이뤄졌다. 이를 무너뜨리고자 1382년 상인들과 공장주들이 아이디어를 짜내는데 그것이 바로 용역경비원이었다. 그 때 이름으로는 용병. 고용된 용병들이 노동자들이 살던 빈민촌을 에워싸고 한 집 한 집 부수며 노동자들을 끌어내고 학살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6년 미국 노동자들의 총파업 때 체포돼 교수형을 당한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 스파이즈의 유명한 최후 진술 한 구절을 읽어보자.

"불꽃 하나는 발로 짓밟아 꺼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방에서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불꽃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은 들불이다."

큰 불도 결국은 꺼지고 마는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불꽃은 왜 이리 질기게 이어지는 것일까. 거기에 수백 년, 수 천 년의 기다림이 담겨 있어 그렇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받고 싶은 오래된 갈망과 염원이 담겨 있기에 꺼지지 않고 꺼질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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