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국회의원 40명이 포퓰리즘을 감시하는 시민단체들과 <포퓰리즘 및 세금낭비 입법 안하기> 서명식을 갖는다고 한다. 국회의원 297명 가운데 40명(13%)이 ''포퓰리즘 및 세금낭비 입법 안하기''에 서약 서명을 했고, 87%인 257명은 서약을 거절하거나 아예 응답이 없다고 한다. 포퓰리즘이 무언지도 확실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마당에 가부 간 선택을 하라하니 답이 어려웠나보다.
◈ 포퓰리즘과 반포퓰리즘의 함정
"포퓰리즘 할 거야 안 할 거야?" 이 질문 자체가 함정을 갖고 있다. ''토끼가 빠를까, 거북이가 빠를까?'' 라고 물을 때 물에서인지 뭍에서인지 단서가 붙어야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지 않은가.
"무상급식을 당장 실시하는 게 좋다. 지금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라도 확대하는 게 좋다. 당분간은 실현이 어려운 이야기니 나중에 다시 논의하는 게 좋다. 무상급식은 그 발상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을 ''무상급식은 좌파적 포퓰리즘인데 포퓰리즘을 찬성하는 거냐, 반대하는 거냐?'' 라고 묻고 그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면 무리이다.
◈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도전?
포퓰리즘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국민당(People''s Party)이 당원들을 포퓰리스트(populist)라고 부른 것이 기원이다. 국민당은 남부 농민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정당이다. 국민당은 누진소득세, 상원의원 직선제, 교통과 통신에 대한 정부규제, 거대한 기업 간의 담합 금지조치 등을 주창했다. 많이 번 사람은 세율을 높여 더 내게 하라, 재벌기업들의 담합을 막아라, 국가 주요 공공시설은 정부가 통제해라. 소득이 낮은 남부지역 농민들이 들으면 박수 치며 환영할만하고 북부 산업자본가들이 들으면 ''사회경제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적고 합리적이지 못한 과격한 정책''들이었다.
물론 미국 국민당은 20년 조금 못되게 버티다 막을 내렸고 그들의 정치적 신념과 강령은 민주당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꿈대로 미국에서는 상원의원 직선제, 철도·석유·철강 분야 공공화, 거대기업의 담합 금지, 소득세법 개정에 의한 누진세 실시는 모두 현실 속에서 이뤄졌다. 21세기에 이르러 그들의 과격했던 주장은 민주주의의 상식이다. 민주주의 정치 안에서 포퓰리즘은 창조적 발전을 위한 도전이기도 한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의 그리스어 어원 demos, 포퓰리즘(Populism)의 라틴어 어원 populus는 그 뿌리가 같다고 한다.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인기에 영합해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뽑아내려 하는 게 포퓰리즘이라면 ''저 사람들 좌파 성향의 포퓰리즘입니다, 투표해 막아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로 보수 대중의 감성과 불안을 자극해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또 다른 포퓰리즘일 수 있다. 결국 정치인의 포퓰리즘과 정치꾼의 포퓰리즘을 시민 스스로가 판별해 내야 한다는 것이 포퓰리즘 문제의 요체이다.
또 퍼주기 식의 공약도 선별해야 한다. 혜택이 즉각 돌아올 수는 있지만 후에 국가재정 파탄으로 두고두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공약사업들이 있다. 정치꾼이 그런다고 국민마저 나중에 어찌 되든 내가 알게 뭐냐며 도덕적 해이에 빠지면 곤란하다. 단기적으로 이득을 누리는 게 누구이고 장기적으로 누가 손해를 입게 되는 지 따져 보자.
단기적으로는 정치인이 이득을 챙긴 뒤 빠지고 나중에 남은 대중이 짐을 떠안게 되는 경우가 질 나쁜 정치꾼의 포퓰리즘이다. 선거를 앞 둔 정치인, 정당이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표를 끌어들이는 것을 분별한 뒤 개인적 이득이 아닌 민주시민의 양식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시민의 책무가 될 것이다.
◈ 왜 포퓰리즘 논쟁이 번성하는 것일까?
포퓰리즘은 권력을 쥔 엘리트들이 오만에 찬 얼굴로 국민을 무시한 채 자기 멋대로 달려 나갈 때 그 토양이 마련된다. 기존 정치권이 민심의 불안과 분노를 못 읽고 겉돈다면 토양은 무르익는다. 국민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면 정치 세력은 저마다 나서서 국민의 불만과 상처를 살피기도 하고 인기에 영합하기도 하며 포퓰리즘을 꺼내 놓는다.
우리 사회는 지금 신자유주의가 양극화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면서 미래가 계속 어두워지며 국민 대중이 불안해하고 있다. 거기에 총선, 대선을 앞두고 민심이 움직이니 감성을 자극하는 정치적 약속들이 고개를 들 수 있다. 누구나 겉으로는 평범한 서민, 다수 국민을 역사와 정치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추켜세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권력 엘리트들이 주도권을 잡고 국민들은 구호만 외치며 졸졸 따라다니는 피동적 추종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참된 개혁을 실천할 의지도 약하고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부조리한 현실을 개혁하겠다고 떠벌리는 약속에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약속을 제대로 지킬만한 능력과 의지가 있고 신뢰할만 한지를 구별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이 국민의 판단에 기여해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 왜 복지 분야만 포퓰리즘 논쟁이 일까?
복지만 포퓰리즘 대상인가? 토목과 건설은 성역인가? 4대강 사업에 일자리가 34만개 만들어진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고용보험이 적용되는 일자리 1500개, 일용직까지 몽땅 합쳐도 4160개 달랑 이것 뿐이다. 거기에 수십 조원 들여 공사하고 1년에 유지보수비가 2500억 원에서 1조원이 들어간다니 이것이야말로 국민을 현혹시킨 질 나쁜 포퓰리즘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강 르네상스도 마찬가지이다. 감사원 감사 결과, 서해뱃길 사업은 한마디로 수요예측과 경제적 타당성 평가 등에서 심하게 부풀려진 사업임이 판명되었다. 비용에 대한 편익의 비율 계산이 실제는 0.52에 불과한데 1.14로 부풀려졌다고 지적한다. 돈으로 환산하면 4천억 원 적자 사업이 600억 원 흑자사업으로 둔갑해 서울시민의 혈세가 투입된 것이다.
서해 뱃길 사업이니 배가 다녀야 하는데 배를 운항하는 선사들은 거길 왜 다니느냐고 한다. 결국 배가 다니려면 서울시가 또 배를 사서 띄우고 밀고 다녀야 할 판이다. 배 띄우는 문제까지 감사원 감사 보고서에 모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것은 포퓰리즘 차원에서 언급도 되지 않는 이유가 뭔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등록금 감면은 복지 포퓰리즘이고 부유층 세금 감면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한다. 전월세 상한가를 정하려 하면 복지 포퓰리즘이면 허술한 뉴타운 개발로 전월세 폭등시킨 것은 그럼 복지 엘리트주의인가?
물론 냉정할 필요가 있다. 무상의료, 기초노령연금,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 무상급식...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내기는 불가능하다. 재정경제부 계산대로 1년에 40조 원에서 60조 원까지 지금보다 세금을 더 거둬야 할지도 모른다. ''부자들에게서 더 짜내, 무조건 해 내'' 라고 소리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막무가내라면 그것 역시 포퓰리즘에서 시민들이 빠지는 도덕적 해이가 될 수 있다. 실천 의지를 갖되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제대로 된 설계도부터 만들고 시작하도록 기다려 주기도 해야 한다.
한 사람의 시민은 하나의 민주주의이다. 포퓰리즘이다 아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가 바로 서고, 국민 개개인아 자기 안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민주 시민으로서 권리와 책임을 찾아 살아 움직이는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야 포퓰리즘과 반포퓰리즘을 외치는 정치인들을 넘어서 주체적인 민주시민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