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직후 억류 공관원, 북한 간첩과 교환 시도

스웨덴 노력으로 풀려나…미국은 나 몰라라

지난 1975년 월남의 사이공(現 호치민)이 공산 정권에 함락된 후 사이공 주재 한국 외교관 3명이 구금된 이후 이들의 석방을 위해 정부가 국내에 수감중인 북한 간첩과의 맞교환을 추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외교통상부가 21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1977년 말 프랑스 정부를 통해 베트남에 수감중인 우리 공관원 3명과 국내에 수감된 북한 간첩과의 맞교환을 제안했다.

당시 베트남 치화 형무소에는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탈출하지 못한 이대용 공사와 안희완 2등 서기관, 서병호 주재관 등 우리 공관원 3명이 수감돼 있었는데, 베트남 정부는 북한의 반대가 완강하다며 이들을 석방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프랑스 외교부는 한국 내에 수감중인 북한 간첩과 맞교환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프랑스의 중재로 북한측과 교섭이 진행됐다.

베트남 정부는 팜반동 수상 지시로 북한에 의사를 타진했고, 북한은 맞교환에 동의하며 우리 정부가 석방할 간첩 명단과 석방 조건 등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후 교환 협상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해 이대용 공사를 비롯한 공관원 3명은 1980년 석방되기까지 5년 가까이 치화형무소에 수감돼 있어야만 했다.

북한은 교환 협상이 중단된 이후 78년 9월 박영수(나중에 서울불바다 발언을 했던 인물) 등 3명을 베트남으로 보내 7일간 이 공사를 직접 심문하며 전향서 쓰고 평양으로 갈 것을 강요하는 등 납북 시도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베트남에 수감됐던 한국 외교관 3명이 1980년 석방되기까지 스웨덴 외무부가 적극적인 석방교섭에 나섰던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파병까지 했던 한국의 외교관 석방과 관련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 외신으로부터 파병국을 홀대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 최근 공개된 당시 외교문서에서 밝혀졌다.

1975년 당시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은 75년 4월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이 베트남 주재 미국인들에 대한 전원 철수령을 내림에 따라 미국인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으며 이에 따라 김영관 주 베트남 대사와 교민 등 60여 명이 미국이 제공한 피란민 수송선에 몸을 싫었다.

그러나 대사관원 8명과 교민 150명은 교통편을 구하지 못해 사이공에 잔류하게 됐고 이 가운데 베트남 당국은 적성국이었던 이대용 공사등 한국 외교관 3명을 혁명방해 혐의로 체포했다.


그 후 잔류 공관원들과 교민들은 가까스로 사이공을 빠져나와 귀국하지만, 이들 3명은 형무소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된다.

베트남은 총살형 위협 속에 이 공사 등에 대한 가이따우(인간개조) 시도했으나 이 공사는 완강히 버티었으며 수감 297일만인 76년 7월27일 처음으로 일광욕 15분이 허용될 정도의 참담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수감 1년 만에 체중은 78kg에서 46kg으로 줄었다.

한국 외무부는 미국, 프랑스, 일본, 스웨덴, 유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UNHCR), 국제적십자위원회 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해 석방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국 등 동맹, 우방국들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 할 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특히 미국은 자국인 철수 당시에도 한국인 철수를 위해 미 해병대를 파병해 달라는 한국의 요청을 거부하기도 했고, 잔류 한국인들의 구출에 대해서는 ''''일본·프랑스 대사관에 알아보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통신은 75년 5월 11일 보도에서 ''''한국은 (베트남전) 파병국인데 미국이 마지막 철수 단계에서 한국인을 거절했다는 소식이 한국에 들어가면 이는 한국전쟁이 재발했을 때 미국이 공약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방관적인 태도로 어려움에 처한 우리 정부 당국에 구원의 손길을 뻗친 곳은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은 라이프 라이프란드 외무차관 등이 직접 나서서 한국인 공관원들에 대한 석방 중재교섭에 나섰다.

라이프란트는 1976년 5월 23일 베트남 정부와 첫 접촉 이후 "석방을 검토해 보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이어 같은해 7.1일에도 인도적 협약인 비엔나 협약에 따라 공관원들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교섭 2년 만인 1978년 스웨덴 정부는 북한 요원들과 교환 조건으로 우리 공관원들을 풀어주겠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1979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비동맹 조정회의와 월남 난민 국제회의에서 월남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한국정부는 원활한 석방 협상을 위해 79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를 통해 베트남에 대한 우회적인 원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에 따라 억류 공관원 3명은 결국 1980년 4월 11일 석방되어 다음 날 김포공항에 돌아오는 감격을 맞았다.

라이프란드 스웨덴 외무차관은 사이공에서 이들을 인계받아 김포공항까지 동행함으로써 자신의 소임을 끝까지 완수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5월 3일 라이프란드 외무차관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닐슨 비서관에게 수교훈장 숭례장을 수여해 사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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