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인생 연 마낙길 "왕년엔 한경기 100득점도 거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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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낙길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위원의 첫 마디는 반문이었다. "요즘 잘 나가는 문성민이나 한선수도 있는데 왜 굳이 나를 인터뷰 하려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로 괜찮느냐''는 마위원의 말에 기자는 "물론이죠. 저희는 너무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번 주 인터뷰로 마낙길 위원이 어떻겠냐는 부서 선배의 말을 듣고 기자는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마낙길 위원은 기자가 초등학교 시절 가장 처음 좋아하게 된 스포츠 스타였다. 배구가 뭔지도 모르고 단지 언니와 동생이 고려증권을 응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현대자동차써비스를 응원하기 시작했고 그중 가장 화려한 플레이를 하던 ''낙길오빠''를 좋아했다.

마낙길 위원은 왕년의 배구스타다. 과거 배구 ''슈퍼리그''시절을 알고 있다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최고의 스타였다. 현재 한국국가대표의 간판 공격수는 문성민(현대캐피탈), 박철우(삼성화재)지만 그 이전의 계보에는 신진식-김세진, 그리고 마낙길 하종화(현 동명고 감독)가 있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반짝거렸다.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다. 서른살의 나이에 선수생활을 접었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배구계를 떠나 다른 길을 찾았다. 그리고 불혹을 훌쩍넘긴 지금 일주일에 한번씩 경기운영위원이라는 이름으로 배구장 나들이를 한다.

마낙길 위원을 만난 것은 상무신협과 KEPCO45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던 12일 성남실내체육관. 그는 이제 유니폼보다는 양복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지점장도 감독처럼 하는거에요"
지난 6일 열린 올스타전 이벤트경기에 마낙길 위원은 여러 올드 배구스타 동료들과 오랜만에 코트 나들이를 했다. 과거 샤프하고 날렵한 몸으로 폭발적인 강타를 때려내 수많은 여자팬을 홀렸던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두둑한 뱃살이 늘어나 있었고 턱선도 찾아보기 힘든 이웃집 아저씨로 변해 있었다. 하는 일에도 변화가 있다. KOVO 경기운영위원은 과거 열정을 다했던 배구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마위원은 이제 ''마지점장''으로 훨씬 자주 불린다.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1997년 5월 1일 현대자동차 분당지점으로 첫 출근,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고 지난 2003년부터 현재까지는 지점장 일을 하고 있다.

운동만 하던 그가 양복을 입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람이 들끓었죠. 유명한 사람이 왔다고 좋아하고 술마시자고 권하고, 그런데 일을 못하니까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더라구요. 술마실때만 찾고 허허"

출근 후 3일만에 사표를 가슴에 품었던 그는 생각을 고쳐잡고 6개월간 업무과 남녀직원 한명씩을 붙잡고 3시간씩 특별과외를 받았다. ''운동할때만큼'' 열심히 일을 배운 그는 승승장구했고 다니는 지점마다 우수지점, 최우수지점을 달았다.

그는 현재 평택 안중지점을 맡고 있는데 지난해 전국 430개 지점중 2위를 했다. 마 위원은 "지점장은 배구 감독과 비슷한 것 같아요. 감독이 작전을 잘못짜면 질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지점장이 제대로 팀원들을 다독이고 치밀하게 작전을 짜지 않으면 성과가 날 수 없더라구요"라고 지점장론을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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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전성기. 몰빵 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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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몰빵 가빈이라는 말 하잖아요. 나는 더 했어. 몰빵 낙길 이지"

남자 프로배구 삼성화재의 외국인 선수 가빈 슈미트는 팀에서 공격을 도맡다시피한다. 이 때문에 팬들에게 ''몰빵 가빈''이라는 말을 듣는다. 남자프로배구에서 한 선수가 한경기 최다 득점을 한 기록은 지난해 현대캐피탈의 신분으로 박철우가 세운 50득점.

그러나 수치화되어 남아있지 않은 과거 경기에는 더욱 어마어마한 기록들이 있단다. 과거 한국배구는 기량이 탁월한 공격수의 경우 수비는 연습할 필요도 없었다. 경기내내 뛰어올라 공을 때려야 했기 때문이다. 마낙길 위원은 1987년 현대와 고려증권의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끝에 현대의 유니폼을 입었고 정확히 10년후 30살의 나이에 코트를 떠났다. 전성기라 할 수 있는 기간은 더욱 짧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마낙길 위원은 ''몰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예전에 성균관대 시절에 한양대와 경기를 할때 100점 가까이 기록한 경험도 있어요. 뭐 공이 올라오면 무조건 때렸으니까. 고등학교, 대학교 지나오면서 그것이 계속됐고 청소년대표, 국가대표, U대표등 정말 하루도 못쉬고 경기를 뛰었어요. 말 그대로 혹사당했지"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마낙길 위원을 괴롭힘과 동시에 서른살만 되어도 ''노장''이라고 치부해버리는 당시 분위기는 그를 은퇴로 내몰았다. 그가 택한 현대는 스카우트를 통해 대학에서 좋은 선수들을 쉴새없이 영입해왔다. 최고의 자리에 있던 그였지만 내려오는 것 역시 빨랐다.

오히려 선수 수급이 어려웠던 고려증권은 현재 프로시스템과 유사하다고 마위원은 덧붙인다. "선수를 뽑아오지 못하다 보니까 선수들이 오랫동안 기량을 펼칠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선수들이 몸관리도 충실히 했지요. 하지만 현대는 달랐어요. 뛰던 안뛰던 실업은 월급도 똑같으니 몸관리 같은것도 안했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되는 부분이에요"

그러나 ''스카우트 전쟁''끝에 현대를 택했던 과거는 너무 잘한 선택으로 생각한다. 고려증권은 사라졌지만 현대는 아직 프로배구에서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그에게 새로운 인생인 ''지점장''을 만들어준 고마운 곳이기 때문이다.

◎배구인 출신 단장 한번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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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도자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에게 제의가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몇 차례 러브콜이 있었다. "영업쪽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왜 생각이 없었겠어요. 관절이라는 것이 굽히는 쪽으로 쉽게 굽혀지지 다른쪽으로는 안되잖아요. 힘들때마다 하던 일이니까 쉬운쪽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 하는 생각 계속 했었지요"

하지만 그는 발길을 되돌리지 않고 내딛은 길을 계속 걸어갔다. 물론 배구를 향한 사랑은 계속 품고 있었다. 한국배구가 암흑기에 빠져있던 지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학 배구동아리등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배구를 가르쳤다. 9인제 배구대회를 자비를 들여 열기도 했다.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이 배구를 좋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저는 충북 진천의 완전 촌사람이에요. 배구를 안했으면 내가 뭘 했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별 사람이 못되었겠더라구요. 내가 배구를 해서 이름도 알리고 사람들의 사랑도 얻고 어엿한 직장도 얻고 했으니 배구에 빚이 무척 많습니다"라며 앞으로 배구인으로서 기여할 길을 찾을 것임을 다짐해보였다.

"지도자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봤어요. 삼성의 김응용 사장이 탄생한 것처럼 배구도 그렇게 안되리라는 법 없지 않습니까. 뭐든 처음이 좋고 중요하죠. 배구인으로 첫 단장, 구단주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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