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단파 라디오 방송인 ''열린북한방송''은 25일 북한민주화위원회 여성부위원장인 탈북자 김영순(74)씨의 말을 인용해 "자신이 요덕 수용소에 들어간 1970년 10월에 이미 강홍식과 그의 아들 강효선(남성, 당시 30대 후반)의 가족들이 수용소에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 강홍식은 니아신(비타민 B군에 속하는 수용성 비타민) 결핍에 의해 일어나는 병으로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펠라그라''라는 병에 걸려 요덕 수용소에 수감된지 1년 만인 1971년 가을 쯤에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김 씨는 "이들은 1970년도 봄에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왔다"면서 "아마도 강홍식씨가 영화계에서 걸출한 인물인데다가 자유분방해 한참 진행되고 있었던 김일성 우상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수용소에 구금시킨 게 아닌가" 추측했다.
김 씨는 "강효선씨의 아내였던 이해순씨와 무용학부 동기로 친분이 있었으며, 이 씨의 말에 따르면 영화출연을 위해 분장을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끌려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씨는 "강홍식의 얼굴이 흑인처럼 새까맣게 탄 얼굴로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면서 "1949년 북한의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을 연출했고 북한에서 유명한 영화인 ''최학신 일가''에서 ''리처드 목사''역을 맡기도 했다"고 말했다.
숨진 강홍식 씨는 부인 전옥 사이에 강효실(딸), 강효선(아들), 강효제(아들)를 두었으며, 강홍식 씨는 해방 이전 전옥과 이혼했다.
"그 뒤 전옥은 딸 강효실과 함께 남한에 남았고 아들인 강효선과 강효제는 아버지와 함께 북한에 남았으며, 당시 수용소에는 첫째 아들 강효선의 가족은 수감돼 있었으나 둘째 아들 강효제의 가족은 없었다"고 김 씨는 말했다.
또, "수용소에 강홍식의 가족으로는 두번째 부인인 일본인 여성과 그 여성 사이에 낳은 딸이 한명 있었으며, 강효선의 가족으로는 아내 이해순과 아들 하나 딸 둘이 있었고 당시 수용소에는 강홍식의 가족 모두 8명이 수감됐다"고 설명했다.
김영순씨는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를 졸업하고 배우로 활동하던 중 고교와 대학 동기였던 성혜림(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째 부인.2002년 사망)의 사생활을 잘 안다는 이유로 요덕수용소에 끌려가 9년간 복역했다가 2003년 한국에 입국해 북한민주화위원회 여성부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