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빛 바다가 코발트블루로…자연이 빚은 색의 마술

가족들과 사이판서 즐기는 ''꿀맛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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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제(妹弟), 어머님 환갑기념 여행은 ''사이판''으로 가면 어떨까요?"

재작년 환갑을 맞은 장모님을 위해 가족들은 큰 맘 먹고 해외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알뜰하기로 세상에서 둘째라면 서러우실 장모님은 여행은커녕 외식도 즐겨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끼 같은 손자 손녀들을 위해 이번만은 선뜻 동의했다. 신종플루 등으로 2년을 묵힌 가족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7일 새벽 1시30분, 우리 일행(어른 5명과 아이 3명)은 사이판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시골공항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입국절차는 까다로웠다. 모든 입국자들은 공항을 빠져나가기 위해 지문 채취와 안구 검색에 협조해야 했다.

사이판의 밤거리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불빛은 힘이 없었다. 공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PIC(Pacific Island Club) 리조트에 짐을 푸니 어느새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옥빛 바다에 깃든 전쟁의 상흔

늦은 아침을 먹고 일행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사이판 최고의 절경으로 이름난 ''만세절벽(anzai Cliff)''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시야 가득 들어온다. 수평선이 반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사이판의 아픈 과거를 씻어내려는 듯 태평양의 파도는 끊임없이 만세절벽을 때리고 있었다.

1944년 7월 9일. 미군의 공격으로 사이판의 일본군은 궤멸됐고, 전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결국 4000여 명의 일본군은 이곳에서 ''천황 만세''를 외치며 바다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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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뒤로 돌리면 자살절벽(Suicide Cliff)이 보인다. 이곳에서도 수많은 일본인들이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이들과 뒤섞여 한 맺힌 생을 마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1939년부터 41년까지 한인 약 5800여 명을 강제로 사이판 등 태평양 일대 섬 지역으로 동원한 사실을 지난해 2월 처음으로 확인했다.

일본군이 천연동굴에 만들어 놓은 ''최후사령부''와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한국인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바쁜 일정에 쫓겨 억울한 영령을 위해 묵념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사이판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관광 포인트인 새섬은 해안에서 50m 정도 떨어진 바위섬이다.

하얗게 빛이 바랜 석회암에 새들이 둥지로 삼는 구멍이 수없이 뚫려 있다. 해질 무렵이면 둥지로 돌아오는 새까만 새떼가 저녁노을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니 날이 저물었다. 리조트 앞 해변을 거닐었다.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 초승달이 뿜어내는 달빛.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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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판의 꽃 마나가하 섬

이튿날에는 아침 일찍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마나가하 섬(Managaha Island)으로 출발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 걱정했지만 곧 화창한 날씨로 변했다.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에메랄드 빛 바다색이 너무 예뻤다.

태양의 각도와 산호에 반사되는 정도에 따라 코발트색부터 옥색까지 다양한 바다색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 바다 위를 모터보트가 낙하산을 매달고 힘차게 달리는 이국적인 풍경도 펼쳐진다. 수면에서 약 30미터 정도 떠서 패러세일링(Parasailing)을 즐기는 사람들은 하늘과 바다의 푸른빛에 흠뻑 취해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된 듯한 모습이다.

강렬한 태양에 반짝이는 순백의 모래사장도 눈이 부시다. 발가락 사이로 밀고 올라오는 모래도 시원한 바람만큼이나 촉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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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한 2km 앞 정도 될까? 산호가 만들어 놓은 천연방파제에 파도가 부딪쳐 하얀 물결이 인다. 그 안쪽으로는 물결도 잔잔하고, 물도 깊지 않아 스노클링(Snorkeling)을 하기에 제격이다.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 물속으로 들어갔다. 산호 속에서 놀고 있는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으면 금방 잡을 것 같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막내 조카 녀석은 입에 자꾸 물이 들어온다며 투덜댄다. 하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마치 커다란 어항 속에 들어온 듯 신기하고 재밌어 하는 표정이다.

산책삼아 마나가하 섬을 맨발로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 바퀴 도는데 20~30분이면 넉넉하다. 뿌리째 뽑힌 나무가 바다에 반쯤 잠긴 모습이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장모님도 "어쩜 이렇게 물이 맑을까! 모래도 곱고. 저기 좀 봐.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바다색이 다 달라!"하며 연신 감탄사를 남발한다.

이날은 토요일이다. 원주민들이 섬 안에서 바비큐를 즐기며 한가롭게 휴일을 즐기는 모습이 평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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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는 날에 즐기는 물놀이

벌써 마지막 날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짜릿한 손맛을 즐기는 바다낚시가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바람도 거세졌다. 배를 한 번 타면 3시간 동안은 돌아올 수 없단다. 아이들 배 멀미가 걱정됐다. 과감히 바다낚시를 포기했다.

꼬맹이 세 녀석은 10살, 7살, 6살이다. "애들아! 비 맞으면서 물놀이하면 얼마나 신나는 줄 알아?"하며 부추겼다.

할머니의 감기 걱정에 잠시 주뼛 쭈뼛하던 녀석들이 이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따라나선다. 아이들이 리조트 내 워터파크에서 가장 좋아한 놀이는 ''슬라이드 타기''다.

스펀지 깔판을 타고 썰매를 타듯 시원스레 미끄러져 내려와 물속에 텀벙. 녀석들도 이 짜릿함이 너무 좋은지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아이들의 놀라운 체력은 당할 길이 없다.

간이 수구장(水球場)에서는 러시아인 소년 둘이서 공놀이를 하고 있다. 우리는 4명. "함께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10살짜리 큰 조카를 러시아 소년팀에 보내 3 대 3 짝을 맞췄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서로 자기한테 공을 패스 하라고 난리다. 골이 들어갈 때 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아이고 이런~'' 어느새 아이들보다 내가 더 공놀이에 흠뻑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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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엔 리조트 앞 바다로 나가서 ''카약''을 즐겼다. 딸아이와 둘이서 배를 타고 노를 저었다. 빗줄기는 점차 가늘어졌고, 역시 산호가 만든 천연방파제 덕에 물결은 잔잔했다. 딸과 함께 노를 젓는 아빠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3일이 정신없이 흘렀다. 사이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 같아 아쉬웠다.

해변도로를 따라 푸른 바다를 보며 터벅터벅 걸어보고 싶었다. 사이판에서 가장 높은 타포차우산(473m)에 올라 섬 전체를 빙 둘러 내려다보지도 못했다.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서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었다. 사이판 박물관과 열대식물원, 동물원을 가보지 못한 것도 아쉽다. 그러고 보니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자정을 조금 넘겨 사이판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이미 축 늘어져 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가족들이 모처럼 함께 한 의미 있는 여행이었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요란만 떤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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