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환은 이번 대회에서 금3(자유형 100m,200m,400m), 은2, 동2개를 따내며 명예회복을 했다. 또 손연재는 한국선수론 최초로 아시안게임 리듬체조 개인종합 메달리스트가 됐다. 그런데 최근 모 기업 에어컨 CF에 동반출연 하는 등 ''새 국민남매''로 떠오른 두 사람에겐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두 선수 심리상담을 전담한 스포츠심리학자 조수경(42, 조수경스포츠심리연구소장)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 상처 컸던 박태환, 마음 열자 상담효과↑…88올림픽 금메달 준비한 이유는
"(박)태환이랑 (손)연재는 ''노력형 천재''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 났지만 엄청난 노력파에요. 이런 부분을 서로 공감하고 키워나간 게 좋은 성과로 이어졌고, 그런 면에서 보람을 느껴요."
조 박사와 박태환의 인연은 2009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태환이 그해 8월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참패하자 ''박태환 특별강화위원회''가 꾸려졌고, 조 박사는 심리상담 전문으로 여기에 합류했다.
조 박사는, 박태환이 국내에 있을 땐 1주일에 한 차례씩 대면상담을 했고, 해외 전지훈련과 광저우 아시안게임 땐 동행해 정신훈련을 진행했다. ''국민 남동생'' 박태환의 심리를 책임지게 된 그는 "태환이에 대한 간접정보는 많았지만 선입견 없이 ''백지상태''에서 상담을 진행하고자 맘먹었다"고 했다. 따라서 박태환에 대한 상담 출발점은 여느 선수처럼 ''좋은 자질을 지녔고, 자기 종목에서 최고기량을 발휘하기 원하는 선수''였다.
상담 초기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로마 쇼크'' 이후 박태환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던 탓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땐 국민영웅으로 치켜세우더니 세계대회 성적이 부진하자 싸늘해진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댓글에 20대 초반 청년은 마음을 크게 다쳤다. 박태환은 ''수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었다.
효과적인 상담을 위한 첫 번째 단계인 ''레포(친밀감) 형성''도 더뎠다. "태환이가 상담하러 처음 왔을 때 ''국제대회 성적 좀 안 좋았다고 사람을 이상하게 취급한다''며 언짢아 했죠." 선수의 심리상태는 스포츠심리검사지의 통계수치와 전문가의 상담내용 두 가지를 데이터화한 후 분석한다. 조 박사는 "데이터 분석결과, 처음엔 훈련과 시합에 임하는 자존감이 낮게 나타났다"고 했다.
그러나 상담이 진행될수록 지지부진하던 박태환의 심리 회복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박태환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상담에 임한 덕분이다. 일단 마음의 문을 열자 박태환은 꽁꽁 감춰뒀던 속내를 털어놨고 상담내용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상담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각종 수치가)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렸고, 나중엔 멘탈코치로서 보람을 느낄 만한 수치를 확보했죠."
조 박사가 상담 중 일관되게 강조한 건 시합에 임하는 마음가짐과 심리적인 부분에서 합리적으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박태환이 경쟁상황에서 흔들림 없이 최고 수행(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 박사는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바로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이었다. 박태환이 ''광저우 아시안게임 기간 중 머리맡에 두고 마음을 가다듬은'' 이 메달엔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
"저희 아버지가 88올림픽 때 마스터플랜을 총제작한 실무자셨어요. 당시 메달리스트 목에 걸어준 메달 중 공장에서 최초로 제작된 금,은,동메달을 소장하고 계셨죠. ''이 금메달은 대한민국의 거국적인 기운이 담겨있으니까 중국에 갖고 가서 가까운 곳에 두고 마음을 잘 정비하라''는 뜻으로 태환이한테 건네줬죠."
1년 넘게 박태환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조 박사는 "태환이가 좋은 성적을 거둘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다"고 했다. "아시안게임 며칠 전에 태환이를 보니까 자주 접하던 사람들도 알아챌 정도로 눈빛이 달랐어요. 본인 자신이 굉장히 편안해 보였고요. ''얼마나 준비가 잘 됐으면 이런 기운이 전달될까'' 깜짝 놀랐죠."
"(태환이가)해외전훈 때도 새벽운동을 한 번도 건너뛰지 않았고, 구토를 불사하면서 힘든 훈련을 성실히 해냈어요. 99.9%가 아닌 100%를 다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88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주고 싶었죠." 이 메달은 "준비과정에서 이미 금메달을 딴" 박태환에게 조 박사가 주는 마음의 선물이었다. 마지막으로 ''동일시 효과''도 염두에 뒀다. "시합이 임박한 선수가 금메달을 지니고 있으면 거기에 동일시 돼요. ''나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에너지가 생겨 수행에도 좋은 영향을 주죠."
박태환에게 인상적인 부분은 또 한 가지 있었다. 박태환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좋은 기록을 내겠다''고만 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훈련성과를 거둔 만큼 금메달 욕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법도 하건만 박태환은 메달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 해서 기자가 각종 기사를 샅샅이 뒤졌지만 빈 손이었다.
이는 박태환이 결과목표가 아닌 수행목표에 중점을 둔 덕분이다. 결과목표는 ''금메달 획득''같은 시합 결과에 집중하지만 수행목표는 ''기록 향상''같은 과정에 신경을 쏟는다. 조 박사는 ''목표 설정''을 통해 박태환이 수행목표에 초점을 맞추게 했다. "목표를 결과에 두면 불안,공포에 떨게 되는 생리적 현상이 생겨요. 반면 (목표를)과정에 두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한 번 해보자''는 욕구가 저절로 발생하죠."
조 박사는 박태환을 전담 지도한 마이클 볼 코치와 상담에 관한 의견을 공유하며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다. "볼 코치가 ''상담할 때 메달보다 기록향상 부분을 강조하는 게 좋지 않느냐''며 저한테 제안한 적도 있어요. 수영강국 호주 국가대표 사령탑 출신인 만큼 경험적으로 선수에게 도움이 되는 게 뭔지 알고 있던 거죠." 셀프토크''(자기에게 말걸기) 효과도 무시못한다.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본인 입으로 자꾸 말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사람은 말한 대로 마음이 움직이고 행동하게 되어 있다"고 조 박사는 설명했다.
◈ 낙심 컸던 손연재, 다독거리자 자신감↑…"스포츠심리상담, 메달색깔 바꾸죠"
조수경 박사는 "단체전은 ''메달 가능성이 많다''는 희망적인 상태에서 광저우로 출발했다. 그런데 근소한 차이로 4위를 해서 연재가 많이 아쉬워했다. ''일본에 동메달을 빼앗겼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단체전이 끝난 후 손연재는 조수경 박사와 전화로 상담을 했다. "단체전에서 4위를 한 다음 실망감이 컸어요. 개인전은 거의 포기상태였는데 조수경 박사님이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주셨죠." 손연재는 개인전 예선을 겸한 단체전에서 4종목 합계 79.300점을 받았다. 본인의 평소점수보다 잘 나왔고, 전체 4위에 해당할 만큼 분전했다. 하지만 놓친 메달에 대한 속상함은 좀체 가시지 않았다. 메달을 못딴 게 모두 ''내 탓''처럼 느껴졌다.
조 박사는 낙심한 손연재를 이렇게 다독거렸다. "왜 그렇게 눈물 흘리고 안타까워 하니? 메달은 못 땄어도 네 개인목표는 달성했잖아. 어쩌면 힘 빠지는게 당연해. 그러니까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고 본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비합리적이야. 이미 끝난 단체전은 잊고 내일 있을 개인전에 집중하도록 하자."
개인전 메달은 기대하지 못했다. 경쟁자들이 워낙 쟁쟁했기 때문이다. 손연재는 "개인전 시합날 심적으로 흔들렸는데 조 박사님과 대화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조 박사는 무슨 말을 들려줬을까. "메달보단 ''단체전 때 보다 더 나은 수행(경기력)을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연재가 시니어로 이렇게 큰 대회는 처음 출전하는 만큼 ''시합을 즐기는 선수''로 스타트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선수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시합에 임하면 누구나 불안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를 ''시합불안''이라고 한다. 특히 손연재는 "대기실에서 앞선수의 연기를 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때 다리를 덜덜 거릴 정도로 긴장하고 떤다"는 귀띔. 시합불안을 낮춰주는 게 스포츠심리학자의 주요 역할인 만큼 조 박사는 "연재가 시합불안 자체를 생각하지 않도록 전략을 세웠다"고 했다.
손연재는 아시안게임에서 뜻밖의 메달을 거머쥔 후 자신감이라는 날개를 달았다. "연재는 ''나는 잘 할 수 있다''는 유능감과 심리적인 잠재력을 타고났죠. 승부욕이 강한 만큼 상담을 받아들이는 속도도 빨랐어요. 저는 그걸 자극시켜준 것 뿐이에요." 그러면서 조 박사는 "저로서도 스포츠심리상담이 꼴찌를 1등으로 바꿔주진 못하지만 메달 색깔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손연재는 선진 기술과 러시아어 습득을 위해 지난 9일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노보고르스크 훈련센터로 떠났다. 조 박사는 당분간 해외에 체류하는 손연재와 인터넷전화로 상담을 계속하게 된다. 스포츠심리학의 현장적용(스포츠심리상담)에 대한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올 3월 모 대학에서 스포츠심리상담 강의를 맡게 된 조 박사는 상담의 최종목표를 이렇게 설명했다.
"선수가 피나는 노력을 하고 고통스러운 훈련을 견디는 건 결국 자기가 하는 운동을 즐기고 행복한 선수가 되기 위한 거죠. 선수 스스로 ''나는 행복한 선수''라는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게 스포츠심리상담가로서 최종 지향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