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허영만과 조운학의 문하생을 거쳐 1993년 ''비상착륙''으로 데뷔했고 성수대교 붕괴 등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사고를 두 소년의 성장담과 엮어 재구성한 ''야후''(1998)로 스타덤에 올랐다. 지난 2008년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된 웹툰 ''이끼''는 약 4년전 인터넷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그의 두번째 대표작이다.
만화 ''이끼''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어 가정과 일 모든 것을 잃은 한 집요한 성격의 남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30년간 은폐된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신을 경계하는 마을사람들의 비밀을 서서히 파헤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스릴러다.
연재 와중에 영화화가 결정되고 그 과정에서 무려 18군데 영화사가 관심을 보일 정도로 ''킬러아이템''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1000만 감독'' 강우석이 연출을 맡으면서 2010 핫 프로젝트로 떠올랐다.
영화 ''이끼''는 엔딩을 제하고 원작과 거의 유사하다. 캐릭터의 성격과 관계 등이 변형되고 단순화된 측면이 있지만 원작의 느낌과 분위기를 충실히 담아냈다.
''이끼'' 개봉을 앞두고 만난 ''원작자'' 윤태호 작가는 자신을 영화 ''이끼''의 일원이라고 소개했다. 만화 연재와 영화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영화가 기획되고 촬영되고 완성되는 과정에 깊숙히 참여한 까닭이다.
윤태호 감독은 "각본을 맡았던 정지우 감독, 강우석 감독과 꾸준히 소통하고 또 촬영 와중에 추가된 신을 위해 대사를 쓰기도 했다(마을 사람들이 육회 먹는 장면에서 "이것도 생식 아냐?"등)"며 "마치 공동운명체같은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경이롭고 감동적이었던" 일련의 과정이 창작작업을 하는 자신에게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 윤작가는 "제 작품이 도마 위에 올려 진 첫 경험이었다"며 "시나리오 회의 등에 참석하면서 ''내 원작이 구멍 뚫린 치즈였구나'' ''이야기 구조로써 빈틈이 많구나''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사실 전 모호함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큰 줄기는 있었지만 주인공이 어디로건 향할 수 있다고 봤고 이야기는 서서히 구체화됐다. 어떤 대사로 인해 제가 예상한 것과 다른 이야기의 결이 나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촬영 전에 의심나는 모든 것에 답을 내리고 움직여야 했다. 그런 영화적 방식을 끌어들여 내 세계를 단단하게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해보고 싶다."
실제로 영화화 작업이 원작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도 있다. 바로 주인공 류해국(박해일 분)의 결말이다. 원래는 박해일의 파멸스토리였다. 하지만 류해국의 아버지 류목형(허준호 분)의 비중이 커지면서 결과적으로 더 큰 이야기로 자가발전해버렸는데 애초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정지우 감독과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을 바꿨다. 정지우 감독은 자신이 품은 의심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진실을 파헤치는 류해국의 가치에 주목했다. 윤작가는 "류해국의 가치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나 역시도 동의했다."
''이끼''는 대결 구조로 보면 한없이 탐욕스런 ''인간'' 천용덕과 구원에 집착해 ''신''을 지향한 류목형의 대결이 류목형의 패배로 일단락된 뒤 시간이 흘러 천용덕과 류해국의 싸움으로 재개된다. 다시 말해 사소한 싸움을 끝까지 해서 이긴 아들이 거대한 싸움을 하다 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승리하는 이야기다. 모름지기 세상은 사소한 움직임으로 변화가 시작된다.
윤작가는 "류해국은 비록 비호감인 캐릭터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적 잘못과 사적 잘못이 있다. 또 힘을 가진 사람이 하는 잘못이 더 크다."
원작과 다른 결말에 대해서는 "강감독의 비전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특히 영화에서 사건의 열쇠를 쥔 홍일점 이영지 캐릭터(유선 분)는 원작에서 불충분하게 다뤄져 아쉬움이 많았던 캐릭터다.
윤작가는 또한 시종일관 어둡고 진지한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유머가 많이 반영됐다는 의견에 " 그 부분은 못내 서운하다"고 토로했다. "원작에서도 제 나름대로 은근한 개그를 구사했다"며 "사실 제 본령은 유머다. 개그만화가 제 본업인데 최신작만 본 분들은 그걸 몰라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유머감각 풍부한 윤작가는 차기작으로 바둑을 결합한 한 직장인의 고군분투기를 준비 중이다. 그가 직장만화의 새지평을 열어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