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적인 인구증가 - 170만 명에 달하던 서울인구는 전쟁으로 피난을 떠나자 1951년 64만8000명으로 43.8%가 감소, 서울은 ''시민없는 도시''가 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엔 다시 100만 명을 넘었고, 1957년에는 167만여명으로 급증했다.
◈서울 토박이 격감 - 6.25전쟁으로 다양한 차원의 인구 뒤섞임 현상이 일어나면서 서울 토박이의 비중이 격감했다. 1960년 서울 토박이의 비중은 43.5%로, 다른 도시들이 2/3가량 토박이로 구성된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남초(男超)도시에서 여초(女超)도시로 - 6.25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서울은 남초도시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20∼30대 남성들에게 의용군 입대와 부역을 강요했고, 남.북한 군이 공방을 거듭하면서 1951년 서울인구의 남성은 79.5%로, 여초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미제물품의 선호와 유통 - ''미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유행어처럼 미국문화가 빠르게 유입됐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 시장에는 불법으로 유출된 미제 물건시장이 형성됐고 단속반이 나오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해 ''도깨비 시장''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식생활의 변화 - 미국의 밀가루 원조로 수제비, 국수, 찐빵 등 분식센터가 유행했고, 미군의 군대식 깡통음식과 미군부대의 남은 음식으로 만든 ''꿀꿀이 죽''이 유행했다. 서울 수복후에 양과점, 빵집이 급증했고 이문설렁탕, 형제추탕, 청진동 해장국등과 같이 청진동, 무교동을 중심으로 주점과 막걸리집이 번창했다.
◈높은 교육열 - 교육은 피난지에서도 노천수업, 천막교실등의 형태로 계속됐으며 전쟁이후에는 ''콩나물 교실''에서 수업을 받거나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2부제, 3부제 수업이 실시됐다.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환경속에서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만은 학교에 보낸다", "논 팔고 소 팔아도 학비는 댄다"는 말처럼 교육에 대한 열정은 더욱 활발하게 타올랐다. 이것은 전쟁이후 폐허를 딛고 근대화를 이룩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이밖에도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친족간에도 서로 믿지 못하는 극도의 불신분위기가 조성돼 소가족 중심의 가족형태는 도시화와 함께 전쟁이후에도 가속화됐으며 전쟁고아를 위한 아동보호시설이 급증하고 반공의식과 국가에 대한 불신이 고착화됐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6월 17일부터 8월 8일까지 <1950...서울...-폐허속에서 일어서다> 특별전을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