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하면 큰일난다"…이순신 장군상 건립 비화 공개

1968년 장군상 건립 참여자들, 동상제작에 얽힌 사연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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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8년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이순신 장군 동상의 건립 비화가 공개됐다.

서울시가 이순신 장군상을 보수하기 위해 당시 장군상 건립에 관여했던 조각.주물 참여자 7명을 찾아 동상제작에 얽힌 사연들을 들으면서 밝혀진 것.

◈ 2층 건물 높이만한 대형동상을 어떻게 만들었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처음에는 5m 규모로 계획해 조각 중이었으나 상부지시에 의해 지금의 크기인 6.5m로 변경됐다.

세종로가 100m로 확장되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해 동상규모를 크게 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

청동주물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찰흙으로 전체 모습을 만들었다.

당시 점토 조각은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1986년 작고) 작가의 자택 마당에서 천정이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설 작업장에서 진행됐는데 동상 크기를 5m에서 6.5m로 늘리는 바람에 얼굴과 투구등은 천정 플라스틱을 뚫고 완성했다. 김 작가의 제자로 점토 조각 작업에 참여했던 백현옥(70)씨는 "당시 선생은 초봄부터 여름까지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4~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점토와 석고작업에 열중하는등 심혈을 기울였다"고 회고했다.

◈ 동상 주재료인 구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동상 주조는 성수동에 있는 대광주조 공장에서 진행됐다.

동상의 주재료인 청동은 구리와 주석등이 일정비율로 배합돼 만들어진다.

대광 공업사에서 주조기술자로 일했던 김주남(65), 류용규(63)씨는 "경제사정이 열악한 당시 상황에선 구리공급이 어려워 처음에는 국방부에서 공수해 온 탄피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 번의 주조 작업 과정에서 주물이 제대로 주입되지 않는등 주조 작업이 잘 이뤄지지 않아 결국 탄피는 모두 버리고 해체된 선박에서 나온 엔진, 놋그릇, 놋숟가락과 같은 일반 고철등을 사용했다.

이마저도 양이 모자라 한 번에 주물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재료가 조달되는 대로 작업을 하다보니 동상 재질과 두께가 고르지 못했고, 색상 또한 균일하지 않아 청동 고유의 색을 내지 못했다.

결국 원래 선정했던 색상(짙은 청록색)의 페인트와 동분을 섞어 표면을 칠했다.

6조각으로 나뉘어 주조된 동상 몸체를 결합하는 과정에서 이음부위는 발전기를 돌려 전기용접이 실시됐는데 동상재료와 같은 성분의 용접봉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부산 미군부대에서 구해 온 구리 용접봉이 사용됐다.

이 때문에 동상 외부는 전체를 용접했지만 내부는 일부밖에 하지 못해, 현재 내부적으로 많은 균열이 발생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8t 규모의 동상을 어떻게 운반했나? = 지금과는 달리 운반 장비가 열악했던 8t 규모의 대규모 동상을 광화문까지 운반하는 것도 일이었다.

당시 파일 전력이라는 회사의 크레인 기사로 근무했던 이기종(72)씨는 "당시 사용된 크레인은 일본에서 수입해 온 최신 장비였으며 8t의 동상을 들어 올릴 수 있었던 국내 유일의 장비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장비를 한 번 사용하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등 아주 귀하신 몸이었다고.

동상은 대낮에 세종로의 모든 전차를 멈추게 한 후 안치 작업을 벌였는데 트레일러에 실린 충무공 동상이 도착하자마자 취재열기가 뜨겁게 달구어 졌다고 했다.

특히 동상 안치 작업을 하기 전 고위 관계자로부터 "작업을 하다 떨어뜨리면 큰일난다"며 겁을 주기도 해 걱정을 많이 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 2년간의 산고 끝에 마침내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동상이 완성됐고, 68년 4월 27일 광화문사거리에서 제막식이 거행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참여자로부터 기증받은 기록물과 사진, 영상물등 소장자료와 입수한 증언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동상을 천년을 지켜낼 수 있는 건강한 이순신 장군 동상으로 재탄생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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