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사랑을 만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시인들이 말하는 '썸'이란 말은 매번 수수께끼였다. 영어(Something)이지만 영어로는 해석될 수 없는 '썸'이 도대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소유&정기고-썸)"라든가 "사라져 아니 사라지지 마. 네 맘을 보여줘 아니 보여주지 마(볼빨간사춘기-썸 탈꺼야)" 등 모순적인 단어들의 조합으로만 받아들여야 했다.
6년 전, 사랑의 사각지대를 들춰낸 논문 '썸 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등장했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6년간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찾아보는 논문 중 하나다. 논문 사이트 DBpia 기준, 논문 조회 수가 18만 회에 달한다. AI 등 핵심 학술 주제들을 모두 제치고 상위 0.1% 논문에 등극했다.
논문 저자는 경희대 철학과 최성호 교수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고 철학자가 된 그는 '피해자다움', '우리 마누라' 등 매번 한국 사회에 뜨거운 화두를 던져왔다. 이번엔 '청춘의 연애'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썸'은 도대체 무엇일까.
CBS노컷뉴스는 최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썸이 무엇인지'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었다. 최 교수는 '누구와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 이전에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필요한 이유까지 설명했다. 성년의 날인 18일(월)을 하루 앞두고, '청춘들의 썸 타기'를 해부했다.
아래는 최 교수와의 일문일답.
-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경희대학교 철학과에서 약 20년간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최성호 교수입니다.
- 철학을 전공하지 않으셨다는 이력이 특이하다.
제겐 두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하나는 △학부 △석사 △박사 모두 철학과를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철학과를 전혀 나오지 않은 철학 교수는 제가 유일하지 않을까(웃음). 학·석사는 물리학을, 박사는 과학-철학 협동 과정을 공부했다.
또 하나는 한국에서 공부했지만 외국에서 먼저 교수가 됐다는 점이다. 유학 경험이 없다. 영국 케임브리지와 호주 시드니를 거쳐 캐나다에서 교수직을 맡았다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 논문 주제를 '썸'으로 정한 계기는 뭔가.
기존 관심사는 아니었다. 공부하기 전까지 나도 썸이 뭔지 제대로 몰랐고, 큰 관심도 없었다. 한 10년전, 갑자기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불안장애를 비롯한 문제들을 겪다보니, 인생에 변화가 필요했다. 먼저 공부하는 것부터 바꿨다. 대한민국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철학자로서, 한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작업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한국 현대 철학의 사각지대를 살피다가 '썸 타기'를 찾았다.
썸 타기 현상의 기원 자체는 오래됐다. 조선시대 이몽룡과 성춘향도 썸을 탔다. 하지만 그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었다. 최소한 제가 젊었을 때조차 썸 타기라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 이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썸 타기를 통해 우리 사회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썸이 뭔가.
썸이라는 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다. 내가 상대방을 향해 피어오르는 마음을 진짜 내 마음으로 인정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일 때, 썸을 탄다고 규정했다.
- 과거에는 썸에 대한 논의가 없었나.
과거 이정규의 '썸을 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는 썸 타기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A와 B가 서로 썸을 타는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상태를 '인지적 불확실성'이라고 부른다. 이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내게 맛있는 걸 사주면서 돈을 쓴다든지, 밤 늦게까지 전화하면서 시간을 함께 보낸다든지 등 정황 증거로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한다. 이정규는 이렇게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단계, 그 과정을 썸 타기로 이해했다. 하지만 썸 타기의 본질은 '나'다.
- '썸'타기를 '나'에서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뜻인가.
맞다. 썸 타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나 스스로를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출발해보자. 인간은 반성하는 존재다. 동물과는 다르다. 동물은 졸리면 잔다. 인간은 졸려도 참을 수 있다. 금연을 선언했지만, 자꾸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 욕구를 자제한다.
바람직하지 않은 욕구를 '탈법적 침입자'라고 표현한다. 내 마음속에서 생겨났지만 내가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구다. 상대방에게 자꾸 마음이 가는데도 "이 사람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 혹은 "지금은 연애할 때가 아니야"라며 그 마음을 밀어내려 한다면, 그 호감은 나에게 '탈법적 침입자'인 셈이다.
이때, 상대방을 향한 호감을 나의 진정한 자아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탈법적 침입자로 보고 내쫓을지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가 썸이다.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맞아. 이 마음을 내 진정한 자아로 받아들이겠어!"라고 결심하면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다.
- '썸 타기'의 논의가 단순한 개인에서 관계로 확장되는 것 같다.
과거에는 청년들이 마음 속 판단을 내리는 게 비교적 용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기준이 사라졌다. 분명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청년들이 스스로 명확한 인생을 설계하는 게 불분명해진 시대다. 그 맥락에서 나타난 양상이 바로 썸 타기다.
논문이 발표된 2020년과 지금 2026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청년들은 여전히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고 있다.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이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가'라는 질문부터 해야 한다. 무엇이 올바른 인생일까, 무엇이 진짜 내 모습일까, 나는 나의 어떤 모습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누구와 사랑할 것인가 등에 대한 답변이 부재한 사회에서 썸 타기가 만연해지고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중요한 변화가 벌어지고 있는 거다.
- 대학생들이 헷갈리는 마음을 속 시원히 해결하기 위한 답을 찾기 위해 논문을 찾아보는 건 아닐까.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논문에 대해 많이 물어본다. 학생들이 논문을 읽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중고등학생들한테도 문의가 올 정도로 관심의 폭이 넓다.
하지만 절대 쉬운 논문은 아니다. 길이도 100pg가 넘는다. 대학생들이 가볍게 연애, 썸에 관심을 느껴서 논문을 읽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논문은 더 큰 범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널리 읽힌다면, '썸'은 철학적으로 탐구하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 반대로 말하자면, 그동안 이런 논의가 많이 부족했던 건가.
'썸 타기'를 의미론적으로 분석하는 건 철학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논문의 시작이 대중과 호흡하는 학술적 자극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한 건 맞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작업을 하는 한국 철학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학계에 '한국 현대 철학을 하자'고 요청하고 싶다. 한국 현대 철학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이황 이이 등 성리학을 파고든다. 그걸 평가 절하하는 건 아니다. 다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철학적으로 성찰해볼 만한 주제들도 많다. 지적인 반성에 근거한 한국 철학자들의 소임을 해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