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없이도 무너지는 민주주의…'백슬라이더'의 경고

불평등·양극화가 만든 '퇴행의 정치' 시대
선출된 권력이 언론·법원·선거를 흔드는 방식

수전 C. 스토크스 시카고 대학교의 티파니 및 마거릿 블레이크 석좌교수이자 시카고 민주주의 센터 소장

쿠데타처럼 탱크가 거리를 점령하지 않는다. 선거는 계속 열리고, 대통령과 수상은 합법적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언론을 공격하고, 법원을 흔들고, 선거 결과를 불신하게 만들면 민주주의 제도는 조금씩 틈을 벌리고 약해진다.

미국정치학회 회장 수전 C. 스토크스의 신간 '백슬라이더'는 이 느린 퇴행, 즉 민주주의 침식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협이 더 이상 군부 쿠데타에만 있지 않다고 본다. 21세기 들어 20여 개국에서 선출된 지도자들이 취임 뒤 언론, 법원, 선거, 입법부, 야당, 관료조직, 시민단체를 공격하며 제도적 견제를 약화했다. 책은 이를 "선출된 정부의 정상적인 행동과 군사 쿠데타 사이"에 놓인 민주주의 침식으로 설명한다.

책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정치인은 늘 있었는데, 왜 20세기 말 이후 유권자들은 그런 정치인에게 권력을 쥐여주었을까. 스토크스는 그 뿌리로 소득 불평등을 지목한다. 세계화와 시장 탈규제 이후 불평등이 커졌고, 변화에서 밀려난 유권자들이 우파 종족민족주의 지도자나 좌파 포퓰리스트에게 끌리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주주의 퇴행의 작동 방식도 구체적으로 짚는다. 퇴행적 지도자는 자신이 공격하는 제도를 부패하고 무능한 것으로 몰아간다. 언론을 "적"으로 만들고, 판사를 편향적이라고 비난하며, 선거에서 질 것 같으면 선거관리기구의 공정성부터 의심하게 만든다. 패배한 뒤에는 "승리를 도둑맞았다"는 식의 주장을 퍼뜨린다.

문제는 일부 유권자가 이런 행태를 알고도 묵인한다는 점이다. 책은 그 배경에 양극화가 있다고 설명한다. 반대 진영을 권력 밖에 두기 위해서라면 지도자의 반민주적 행동도 감수하려는 심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퇴행적 지도자들은 이 약점을 활용해 지지자들이 상대 진영을 더욱 혐오하도록 부추긴다.

'백슬라이더'는 경고에만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언론인, 판사, 시민단체, 야당 지도자, 유권자가 민주주의 침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특히 양극화를 완화하고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불평등 축소와 민주주의 강화는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과제라는 진단도 내놓는다.

책 말미의 문장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군사 쿠데타가 민주주의를 죽일 때는 저항의 공간이 즉시 닫히지만, 선출된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약화시킬 때는 "저항과 치유의 공간이 적어도 한동안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백슬라이더'는 그 공간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묻는 민주주의 시대의 경고장이다.

수전 C. 스토크스 지음 | 이대희 옮김 |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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