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배추 소분'에 당근 켜고 '인간 사료' 인기…고물가 생존법

지역 커뮤니티 중심으로 2030 '음식 소분 모임' 확산
채소·고기 등 함께 구매해 소분…'엽떡·마라탕' 소분도
함께 만나 요리·소분하는 '밀프랩 모임'까지
고물가 시대 청년들의 생활 방어형·목적기반 소비

서울에서 자취하는 직장인 김현정(가명·28)씨가 만든 배추찜(왼쪽)과 다 쓰지 못하고 남은 재료와 음식이 쌓여 버린 쓰레기(오른쪽). 김씨 제공

서울에서 자취하는 직장인 김현정(가명·28)씨는 냉장고 문을 열고 한숨을 쉬었다. 며칠 전 배추찜을 해 먹으려 사고 남은 채소가 미처 다 먹지 못해 상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건강하게 요리해 먹으려고 마트에서 채소를 사도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하고 결국 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매일 '오늘 점심은, 저녁은 뭐 먹지?'를 고민하는 1인 가구 청년들에게 식비 부담은 가볍지 않다. 배달이나 외식을 반복하기도 힘들고, 직접 요리하려고 사둔 재료마저 양이 많아 다 쓰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씨 역시 이같은 고민 끝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청년들을 찾기 시작했다.

중동 전쟁 등의 여파로 고물가가 장기화하면서 최근 청년층 사이에서 음식이나 식재료를 함께 사서 나누는 '소분 모임' 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2030세대 1인 가구 청년들이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식비 부담을 함께 나누는, 이른바 '생존형 소비'다.

동네에서 만나 장보고 나눠요…소분모임 확산

지역기반 중고거래 커뮤니티 플랫폼 '당근'의 한 '엽떡 소분 모임' 게시판에 올라온 인증 사진. 커뮤니티 캡처

2일 '당근' 등 지역 기반 커뮤니티 플랫폼을 보면, 최근 음식이나 식재료를 함께 구매해 나눠 갖는 모임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김씨도 채소와 고기 등을 함께 구매해 나눠 갖는 동네 소분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대학생 '자취러'부터 시작해 30대 직장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2030 청년들이 모여 할인 정보와 장보기 계획도 공유한다.

그는 "마트에서 각자 재료를 사 온 뒤 동네에서 모여 나눠 갖고 비용은 N분의 1로 나눈다"며 "한 사람당 만 원 안팎만 내도 여러 재료를 다양하게 가져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는 알배추, 청경채, 팽이버섯, 우삽겹 등을 각자 맡아 사와서 나눴다"며 "하루 먹고 끝낼 정도로 나눠 가질 수 있어서 종종 참여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봄동 비빔밥'이 유행했을 때는 한 참여자가 대량으로 봄동을 구매한 뒤 무료 나눔을 하기도 했다.

김씨는 "자취생들은 회나 생선처럼 가격 부담이 큰 음식은 쉽게 먹기 어려운데, 소분하면 한 끼 먹기 좋게 나눌 수 있다"며 "연고 없이 서울에 올라와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도 있다"고 했다.

이같은 '소분 모임'은 종류도 다양하다. '엽떡(엽기떡볶이) 소분 모임', '마라탕 같이 먹는 모임' 등 특정 메뉴를 함께 주문해 나눠 먹는 모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네 반찬 가게에서 여러 종류의 반찬을 사서 나눌 사람을 구하는 '반찬 소분 모임'도 있다.

20대 여성 이모씨는 지난해 11월 말부터 당근을 통해 '엽떡 소분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젊은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엽기떡볶이는 한 개 가격이 2만 원에 육박하고 양도 2~3인분으로 많아 혼자 먹기엔 비교적 부담이 크다. 현재 해당 모임의 인원은 약 280명이 넘으며, 한 달에 3~4번 정도 꾸준히 운영되고 있다.

이씨는 "엽떡이 먹고 싶은데 양이 많아서 남기게 되고, 냉장고에 보관하면 맛이 없어져 결국 버리게 됐다"며 "함께 나눠 먹을 사람을 찾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함께 모여 소분하면 인당 7~8천 원에 한끼 먹고 가볍게 끝내기 좋다"며 "경제적인 부담뿐 아니라 심적 부담도 덜 수 있다"고 했다.

과자 공구부터 밀프랩 모임까지…절약 물론 소통도

대학생 윤지형(22)씨가 대용량 쿠키를 사서 소분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올린 인스타그램 스토리(왼쪽)와 실제 나눠 가져간 지인에게 받은 사진(오른쪽). 윤씨 제공

대학생 윤지형(22)씨는 최근 이른바 '인간 사료'라고 불리는 대용량 쿠키를 나눠 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모았다. 윤씨는 "먹고 싶은 쿠키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120개 단위로 판매하는데, 혼자선 다 먹기 어려워서 인스타그램 계정에 소분할 사람을 모집하는 글을 올렸다"며 "네 명이 모여 30개씩 나눠 가졌다"고 말했다.

윤씨는 "과자 같은 건 계속 먹다 보면 금방 질리는데 여럿이 나누니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며 "지인의 지인 등과 함께 나누면서, 소분을 계기로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는 점도 재밌다"고 덧붙였다.

'당근'에서 만나서 함께 음식을 만들고 나눠 갖는 '밀프렙(Meal prep)' 모임도 눈에 띄었다. 밀프랩은 식비를 절약하기 위해 며칠 치 식사를 한 번에 미리 만들어놓고 끼니때마다 꺼내 먹는 방식을 말한다.

'2030 밀프랩 만들기'라는 이름의 모임 후기에는 '두부 강된장', '비빔밥' 등 메뉴와 함께 용기에 음식을 나눠 담은 사진이 올라와 있다. 모임 소개글에는 "배달을 줄이고 싶은 분, 식비를 아끼고 싶은 분, 20~30대 자취하시는 분, 혼밥 말고 가볍게 사람도 만나고 싶은 분"을 환영한다고 적혀 있다.

지역 기반 중고거래 커뮤니티 플랫폼 '당근'의 한 '밀프렙(Meal prep)' 모임. 커뮤니티 캡처.

전문가들은 최근 확산하는 청년들의 다양한 음식 소분 모임을 '생활 방어형 소비'로 해석한다. 비용 부담을 나누는 동시에 시간과 노동까지 줄이는 '효율 중심 소비'라는 분석도 있다.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이은희 교수는 "외식 물가 상승으로 식비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소분 모임이나 공동 소비는 청년들의 현실적 대응 방식"이라며 "특히 밀프랩 모임의 경우, 혼자 식사를 준비하는 부담도 덜고 함께 요리하는 경험까지 결합된 소비 방식이 엿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이런 모임이 단순한 절약을 넘어 2030 청년 세대들이 서로 교류하는 라이프스타일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짚었다. 이 교수는 "청년층은 특정 목적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이를 해결하고, 이후에는 관계에 큰 부담 없이 흩어지는 '목적 기반 소비' 성향을 보인다"며 "음식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경험까지 함께 얻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1인 가구가 늘면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이나 외로움도 영향을 미친다"며 "함께 만나 먹거나 나누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연결과 정서적 보완 기능을 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고물가, 1인 가구 증가, 온라인 플랫폼 환경이 맞물리면서 이런 문화가 일상화된 것"이라며 "생존형 소비이면서 동시에 관계와 경험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새로운 소비 형태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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