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 아닌 협의" 선 긋기…CU 사태로 드러난 노봉법 한계

사측, '교섭' 합의 하루 만에 "긴급 협의"로 선회…원청 사용자성 부정 논란
택배업계는 원청 교섭 수용 등 진전…판례 축적 속 회피 전략 한계
노동계, '일터기본법' 실효성 의문…공급망 책임 강화 요구

류영주 기자

편의점 CU(씨유) 물류 자회사인 BGF로지스가 화물연대와 대화 테이블에 앉았지만, 이를 '교섭'이 아닌 '긴급 협의'로 지칭하며 선 긋기에 나섰다.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시행 이후 특수고용직(특고) 노동자가 원청과 마주한 첫 사례로 주목받았지만, 사측이 여전히 '사용자성'을 부정하면서 법 취지가 현장에서 공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단일 교섭' 합의해놓고…이틀만에 "사용자 아냐" 말 바꾸기

25일 노동계와 업계에 따르면, BGF로지스와 화물연대는 지난 21일 '현 상황의 빠른 해결'을 위한 합의서에 서명하며 "단일교섭"을 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 합의서에는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원청 BGF리테일의 이행 보장 역할도 명시됐다. 이에 따라 22일 상견례를 포함해 전날까지 두 차례 교섭이 이뤄졌다.

그러나 사측은 지난 23일 보도자료를 내고 "가맹점 피해를 막기 위해 협의에 나섰을 뿐 사용자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며 교섭의 의미를 축소했다.

BGF로지스 관계자 역시 CBS 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구체적인 쟁점별로 사용자성이 다르기 때문에 교섭이 아닌 사태 수습을 위한 협의"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노동계는 사측이 노조법상 교섭 의무를 피하기 위해 명백한 '말 바꾸기'와 '꼼수'를 부리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5개사 교섭 나선 택배업계…"사용자성 부정, 영원한 방패 안 돼"

사측의 이러한 태도는 BGF리테일→BGF로지스→지역 물류센터→하청 운송사→배송 기사로 이어지는 5단계 구조를 방패 삼아 계약 당사자가 아님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사용자성 지우기' 전략으로 풀이된다.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오민규 연구실장은 "노동조합이라는 관문을 뚫고 나오면 이번에는 '우리가 사용자가 아니다'라며 사용자성을 지우려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CU 측의 '사용자성 지우기' 고집은 빵과 반죽을 배송하는 SPC 물류기사들에 대해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과 노동자성을 인정한 법적 판단과도 배치된다. 또한 동종 업계인 택배 부문에서 개정법 시행 이후 원청 교섭이 속도를 내고 있는 흐름과도 대조적이다.

실제 노란봉투법 시행 직후 CJ대한통운, 롯데글로벌로지스, 한진, 로젠택배, 우체국택배,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 등 주요 6개사를 상대로 원청 교섭 요구가 진행됐다. 이 가운데 우정사업본부를 제외한 CJ대한통운·롯데·한진·로젠·쿠팡 등 5개사가 이미 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한 상태다.

택배 부문에서 이처럼 원청 교섭이 궤도에 오른 배경에는 지난 수년간 파업과 법적 공방을 거치며 특고 노동자의 '노동자성'과 원청의 '사용자성'에 대한 사법적·사회적 판단이 일정 부분 축적돼 온 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즉, 판례가 쌓이고 법적 기준이 명확해질수록 원청이 사용자성을 부정하며 교섭을 회피하는 기존 방식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최근 라디오에 출연해 BGF리테일의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며 "형식이 자영업자라도 실질적으로 경제적 종속 관계에 있다면 노동자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정부는 노동자 개념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 권리 기본법(일터기본법)' 제정을 국회에서 논의 중이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중간지대'를 설정해 특고와 플랫폼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구상이다.

일터기본법 실효성 의문도…"공급망 실사법 도입 필요"

다만 노동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근본적으로 사용자를 교섭 테이블에 강제로 앉힐 수 있는 법적 구속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손잡고'는 "노동부 시행령은 대화를 거부하는 주체인 '사용자'를 테이블에 앉히는 데 초점을 맞췄어야 했다"며 "형식에 얽매여 실질을 놓친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 실장 역시 "일하는 사람 기본법이 통과돼도 원청이 교섭을 거부하는 현 사태의 실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소모적인 '사용자성 인정' 공방을 넘어 노란봉투법 안착과 함께 보다 거시적이고 다각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표적인 대안으로는 공급망 최상단에 위치한 원청(최종 납품처)이 하청 및 특고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 환경까지 점검하고 책임지도록 의무화하는 '공급망 실사법' 도입이 거론된다. 이 제도는 이미 유럽연합(EU)에서 도입돼 단계적으로 시행 중이며, 유럽에 진출한 국내 기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원청이 하청 및 특고 노동자의 노동 환경까지 점검할 책임을 지게 돼 '꼬리 자르기'를 방지할 수 있다. 김 장관 역시 지난해 브리핑에서 "유럽의 공급망 실사법과 같이 책임 있는 경영과 거래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원·하청 간 책임 있는 관계를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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