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바우처 사업계획서를 대신 작성해 드립니다."
올해 처음으로 해외수출 사업을 시작한 김필수(가명)씨는 지난달 출처를 알 수 없는 메일을 받았다. 수출바우처 사업에 지원할 계획서를 대신 작성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을 '수행기관'이라고 소개한 상대방은 컨설팅부터 브랜드 관리, 홍보영상 제작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소벤처기업부나 산업통상부의 수행기관 이력도 내세웠다.
김씨는 불법 브로커라고 직감했다. 정부의 정책자금 대출이나 바우처를 필요로 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사업계획서를 대필해주겠다며 접근하는 것이 브로커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점이 이상했다. 김씨는 불과 일주일 전에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중진공)의 '해외수출 바우처' 사업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진공 관계자들 외에는 알 수 없는 자신의 바우처 지원 내역과 이메일 주소를 '수행기관'을 자처하는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김씨는 "중진공 바우처 사업에서 떨어진 지 딱 일주일 만에 사업계획서를 대신 작성해주겠다는 메일이 왔다"며 "업무 담당자 외에는 사업에 지원한 사실도, 이메일 주소도 알 수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부, 칼 빼들었지만…현장에선 "바뀐 것 없어"
정부가 브로커 근절 대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일선 현장에선 여전히 브로커가 성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중진공은 지난해 말 중소벤처기업부 등과 함께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불법 브로커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불법 브로커를 제보하면 최대 200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한다. 만약 브로커와 부정한 거래를 가졌더라도 자진해서 신고할 경우엔 차후에 불이익을 주지 않기로도 했다.
그동안 브로커를 통해 사업계획서를 대신 작성하고 비용을 지급하는 불법 행위가 빈번했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본 경험이 적은 기업 입장에선 브로커를 통하는 게 업무 수행에 용이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업 여건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발전 가능성이 낮더라도 브로커를 통해 부당하게 자금을 타내는 일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정상적인 기업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에 정부가 브로커를 근절하겠다며 칼을 빼들었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경기 판교테크노밸리에서 IT업체를 운영하는 박모 씨는 "자금이 필요해서 중진공 대출과 바우처를 알아봤는데 주변에서 하나같이 '브로커를 안 거치면 탈락할 것'이라고 하더라"라며 "스스로 해내고 싶었지만 사업에 대한 부담이 커서 어쩔 수 없이 업체를 알아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씨 사례처럼 관계기관의 데이터베이스(DB)가 외부에 유출된 것으로 의심되는 일까지 발생하자 관리에 허점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씨는 "실수든 고의든 내부 자료에서 기업인 정보가 유출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이런 일이 반복되니 브로커를 쓰지 않으면 바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선 브로커를 자처하는 업체들의 능력 여부에 따라 형사 입건도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법무법인 해담 양승철 변호사는 "사업을 따낼 능력이 없는 업체가 자금대출이나 바우처를 받아줄 것처럼 속이고 돈까지 받았다면 사기죄가 성립될 수 있다"며 "(자료 유출 의혹과 관련해선) 메일을 보낸 측이 해당 기업의 개인정보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중진공 측은 내부 자료 유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수사를 통해 밝혀야 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중진공 관계자는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업무 담당자와 직급이 제한돼 있고, 당연히 내부 자료 유출이 있어서도 안 된다"며 "만약 유출된 것이라면 수사를 의뢰해야 할 사안이어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