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인 씨유(CU) BGF리테일과의 직접 교섭을 요구하던 화물노동자가 사측 대체 수송 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이재명 정부의 노정 관계에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현장에 경찰이 배치돼 있었음에도 사고를 막지 못한 데다, 무리한 출차 유도가 비극을 불렀다는 노동계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한 정부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전망이다.
지난 10일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을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갖고 노정 대화의 물꼬를 튼 지 불과 10일 만에 벌어진 일이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21일 정부와 노동계 등에 따르면, 전날 화물연대 전남지역본부 서광석(58) 지부장이 경남 진주 CU 물류센터 앞에서 사측 대체 수송 차량에 치였다.
이번 사고로 서 지부장이 숨지고 조합원 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다단계 하청 구조의 말단에 놓인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수차례 교섭을 촉구했음에도 원청이 무응답으로 일관하면서 빚어진 비극으로, 이른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실질적 사용자를 상대로 한 교섭 요구 과정에서 발생한 첫 사망 사고다.
이들의 교섭 요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BGF리테일은 자회사인 BGF로지스를 통해 편의점 물류를 운영한다. BGF로지스는 다시 협력 운송사를 통해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구조다.
물류센터와 개별 계약을 맺은 협력 운송사 소속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운임 등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1월부터 실질적 권한을 쥔 원청 BGF리테일에 직접 교섭을 요구해 왔다.
노란봉투법 시행 전후로 7차례나 대화를 촉구했지만 사측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결국 조합원들은 지난 5일 파업에 돌입했지만, 원청은 대화 대신 물량 축소와 대체 차량 투입을 강행하며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고 노동계는 주장한다.
이런 가운데 조합원의 사망까지 발생하면서 노동계는 격앙된 분위기다. 화물연대는 사건 발생 직후 긴급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향후 투쟁 지침을 확정했다. 유가족의 위임을 받은 화물연대는 'CU 투쟁 승리 및 열사 정신 계승 화물연대 투쟁본부'로 전환하고 전 조직적인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원청을 '살인 기업'으로 규정하며 경찰과 CU BGF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마련, 원청의 성실 교섭 및 합의, 열사 명예 회복 등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를 위해 이날 오전 11시 경남경찰청 앞에서 공권력 규탄 기자회견을, 오후 5시에는 사고 현장인 진주 물류센터 앞에서 각 지역본부가 총결집하는 대규모 결의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이재명 정부에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사고 당시 현장에 경찰 병력이 배치돼 있었음에도 사망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부 역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경찰이 단순히 사태를 방관한 것을 넘어, 대체 차량의 무리한 출차를 돕고 조합원들의 접근을 막는 과정에서 사실상 사고를 유발했다는 분노 섞인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실제 화물연대본부는 성명서를 통해 "경찰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는커녕 대체 차량 출차를 위해 조합원들을 강제로 밀어내고 현장을 짓밟았다"며 공권력을 강도 높게 규탄했다. 이어 "정부와 관계기관이 반복되는 갈등과 위험 신호에도 실질적 조치를 취하지 않아 결국 죽음으로 이어졌다"며 "정부의 방관이 노동자를 죽였다"고 정부 책임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노동계 내부에서는 원청과 경찰의 이 같은 강경 대응의 기저에 정부의 모순된 노동 정책 시그널이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경찰 등 공권력의 현장 대응 기조는 결국 국가 행정의 바로미터"라며 "원청인 CU가 완강하게 교섭을 거부하고 경찰이 사고를 막지 못한 것은 현 정부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동계 안팎에서는 이번 사고를 두고 지난 2005년 발생한 '고(故) 김태환 열사 사건'을 떠올리고 있다. 당시 충북 충주에서 특수고용직인 레미콘 노동자들의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 투쟁을 이끌던 한국노총 김태환 충주지부장이 사측이 고용한 대체 투입 차량에 치여 숨졌다.
이 사건 이후 분노한 한국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하고 노사정위원회 전면 탈퇴를 선언한 바 있다. 이번 진주 물류센터 사고 역시 특수고용 노동자가 파업 중 대체 차량에 희생됐다는 점에서 20년 전 사건과 유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사태가 정권 차원의 위기로 번질 가능성에 정부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수습에 나선 모습이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사고 직후 진주 사고 현장을 찾아 노사 간 대화 재개를 모색했다. 아울러 물류 정책을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2차관 역시 현장에 급파돼 노사 양측을 직접 만나며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정부는 이번 사안을 노란봉투법과 직접 연결하는 데에는 선을 그었다. 노동부는 설명자료를 내고 "갈등이 대화를 통해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고 악화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도 "이번 사안은 개정 노동조합법 제2조에 따른 원·하청 교섭 문제를 넘어선 상황"이라고 밝혔다.
노동부는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개인사업자 성격이 강한 점을 언급하며, "소상공인·자영업자 등 취약한 지위에 있는 이들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가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 것이 갈등의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해관계자 간 대화·소통 구조를 마련하는 방안을 관계 부처와 함께 모색하겠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노동부는 "화물연대가 노란봉투법에 따른 노동위원회의 사용자성 인정 절차를 밟지 않았고, 단체교섭 판단지원위원회에도 문의하지 않았다"며 절차적 문제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