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이어진 착취·폭행…"벗어날 생각 못 해"
40대 남성 A씨는 지난 2021년 부산 서구 한 식당에 취직했다. 식당 사장인 B씨는 옛 직장동료였고, 그의 제안으로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A씨는 B씨로부터 하나둘씩 업무 지적을 받았다. B씨는 지적과 함께 A씨를 한두 대씩 툭툭 쳤다. 폭행 강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세졌다.A씨는 가게 청소부터 재료 준비, 서빙 등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았다. 자정쯤 퇴근한 그는 가게에서 쪽잠을 잔 뒤 아침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쉬는 날은 없었다. B씨는 이런 A씨 일거수일투족을 폐쇄회로(CC)TV로 감시했다.
영업이 끝나면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B씨는 '일 처리가 느리다'는 등 이유를 들며 고무망치나 칼갈이 같은 도구로 A씨를 무차별 폭행했다. 물리적인 감금은 없었지만, A씨는 가게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일을 했다. 그러다가 목이 졸려 기절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까지 치닫자 지난 12일 경찰에 신고했다. 온몸은 멍투성이에 다리 근육은 파열됐고, 영양실조까지 걸린 상태였다.
수년간 착취와 폭행을 당하면서도 A씨는 B씨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A씨는 "오랜 기간 폭행과 폭언을 당하다 보니, 머릿속에는 당장 다음날 영업과 잘못했을 때 당할 폭행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해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계속 심하게 질책하거나 '절대 못 그만둔다'는 말을 들으니 스스로 체념하고 벗어나는 걸 포기하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가스라이팅 범죄, 장기간 이어지며 피해 더 심해져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범죄'라고 분석한다. 가스라이팅 범죄는 피해자가 스스로 범죄를 인식하지 못해 잘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장기간 이어지며 피해가 더 심해진다는 특성이 있다.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두 사건처럼 사회적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지위 격차가 있는 노동자들은 가스라이팅 범죄에 취약하다. 종속 관계가 오래 이어지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작용해 도움을 요청할 생각조차 못 하게 된다"라고 분석했다.
이어 "피해가 만성화하면 인지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에 구출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이 경우 피해자가 직접 신고에 나서기 어렵기 때문에 범죄 발굴이 쉽지 않고, 피해가 점차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가스라이팅 범죄는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다. 최근 전남 목포에서는 휴대전화 대리점 직원이 10년간 사장으로부터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을 당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전이 알려지며 공분을 샀다. 검찰은 두 사람 관계가 강압적 통제와 경제적 착취를 매개로 한 심리적 지배, 즉 가스라이팅에 의한 주종관계였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정의하고 처벌할 것인가…"사회적 합의 필요"
우선 현행법에는 가스라이팅 범죄에 대한 정의나 처벌 근거가 명시돼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폭행 등 범죄 행위를 위주로 수사와 처벌이 이뤄지며, 상대적으로 심리적 피해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실정이라고 범죄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범죄 수사 단계에서 심리 전문가가 피해 내용을 종합 평가해 양형 등에 반영하는 '범죄피해평가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지난해 강력범죄 가운데 이 제도가 시행된 비율은 0.6%에 불과했다. 또 가스라이팅 범죄뿐만 아니라 모든 유형의 범죄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실제로 가스라이팅 범죄가 발생했을 때 유명무실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관련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가스라이팅 범죄를 어떻게 정의하고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석대 경찰행정학과 배상훈 교수는 "가스라이팅은 일반적인 성인 누구나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범죄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와 더불어 수사기관과 법원까지 가스라이팅 피해에 대한 합의와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해당하는 사건에 대해 가스라이팅 위험성 척도 평가를 전문적으로 실시하고, 공신력 있는 증거로 채택될 수 있게 규정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재판 양형에서도 가스라이팅 요소가 확인되면 가중 처벌을 하는 등 처벌 근거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여러 기관이 관련 수사에 대한 통합 권고안을 만들어 사회적 구조망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