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받았다고 고문…제주 간첩조작 피해자 90명 확인

제주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보고서 발표…출소 후 사회적 낙인 고통

법원. 고상현 기자

과거 군사정권 시절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제주도민들. 피해자들은 출소 이후 사회적 낙인 때문에 사회복귀에 어려움을 겪었다. 폭력과 고문으로 얼룩진 가혹행위로 장시간 후유증이 지속됐다. 제주도가 전국 최초로 진행한 '제주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군사정권의 간첩조작…희생양은 도민

제주도는 18일 사단법인 제주대안연구공동체에 의뢰해 진행한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종합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제주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지원 조례'에 따라 2022년부터 4년간 진행됐다. 조사 결과 90명의 피해자가 공식 확인됐다. 이 중 57명을 대상으로 심층면담도 이뤄졌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기 집중된 간첩조작사건은 공안 기관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와 연관지어 간첩으로 조작한 인권침해 사건이다.
 
일제강점기 제주-오사카 정기항로가 생기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인이 많았다. 가족들이 일본에 많이 살다 보니 해방 이후에도 교류가 이어졌다. 남북 분단 이후 재일제주인 중에는 북한계인 조총련에 가입한 사람도 많았다. 이 때문에 도민이 간첩으로 조작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인근 히라노운하. 제주인들은 운하 주변에 모여 살았다. 고상현 기자

국정원과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방부, 경찰 등 공안기관의 영장 없는 연행, 불법구금, 폭력, 고문, 검찰과 법원의 협조 또는 방임이 간첩조작사건으로 이어졌다. 불법적인 과정을 통해 확대, 왜곡, 조작된 사건은 군사정권 시절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됐다. 주 희생양은 도민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은 '만년필 간첩조작사건'이다. A씨는 1967년 일본에서 친척들로부터 양복 1벌과 만년필 3개를 받았다. A씨는 귀국 후 동생들에게 만년필을 한 개씩 나눠줬다. 이게 빌미가 돼 북한 천리마운동 성공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된 만년필을 받았다며 모진 고문 끝에 징역형을 받았다.
 

옷 벗긴 채 매달고 폭행…잔혹한 가혹행위

이번 조사를 통해 공식 확인된 피해자 90명 중 성별 분포를 보면 남성이 93.3%(84명), 여성이 6.7%(6명)다. 피해 당시 기준 연령별 분포에선 20~40대가 81.1%(73명)로 나타났다. 생계 활동이 활발한 연령층에서 피해가 집중됐다. 남은 가족이 피해자 구명활동과 생계유지를 동시에 감당했다.
 
직업별 분포를 보면 노동자와 농어업 종사자가 61.1%(55명)로 가장 높았다. 사업자와 자영업 종사자는 18.9%(17명), 군인과 경찰, 교사 공무원은 6.6%(6명), 학생은 7.8%(7명)로 조사됐다.
 
특히 '월북과 찬양' 유형을 제외한 일본 관련 사건이 92.2%(83명)를 차지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제주에서 생계 곤란으로 일본에 밀항했다가 강제 송환된 경우, 일본에 지인이 있거나 관광 등 체류 경험이 있다는 이유, 일본 방문 경험이 없는데도 친척이 조총련 계열이라는 이유 등에서다.
 
제주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보고서 캡처

공안기관의 가혹행위는 옷을 모두 벗긴 채 매달아 놓는 행위, 수면 박탈, 음식제공 중단, 지속적인 폭행,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으로 매우 잔혹했다. 특히 피해자들이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은 수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으면 가족을 데려와 고문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정신적, 육체적 학대가 반복됐다.
 
불법구금에 가혹행위로 허위진술을 강요받았을 뿐만 아니라 출소 이후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간첩 낙인으로 경제활동이 원활하지 않았고, 외부활동을 피했다. 일부 피해자는 그 낙인을 벗기 위해 고향을 떠나거나 이름을 바꿨다. 그 피해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국가 사과해야…실질적 낙인 해소 계기"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를 위한 제도적 한계도 분명했다. 제주대안연구공동체는 보고서를 통해 '피해자 지원이 조례 수준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 전반을 포괄하는 국가 단위 법 제정을 추진해 전국의 유사 피해자와 연계한 제도화를 도모해야 한다'며 법적 기반 확충을 요구했다.
 
특히 고문에 따른 정신적, 신체적인 피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고문과 불법구금 후유증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와 연계해 피해자와 가족에게 심리상담과 의료 지원을 체계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피해로 인한 실직과 사회적 낙인에 따른 고립을 극복할 수 있도록 생활비와 주거, 노후 지원책을 병행해야 한다. 법과 제도 정비를 통해 구체적인 지원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제주도청. 고상현 기자

국가의 사과와 역사교육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제주대안연구공동체는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는 단순한 의례적 절차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씌워진 사회적 낙인을 해소하는 실질적인 계기다. 간첩조작사건의 실상을 교육 등을 통해 알려서 민주시민교육의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제주도는 이번 피해실태 종합보고서를 앞으로 재심과 진실규명 절차의 기초자료로 제공하는 한편, 제주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를 위한 명예회복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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