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은 경쟁을 거듭하며 권위를 쌓았다. 베니스는 역사로 무게를 더했다. 부산은 달랐다. 1996년 빈 손으로 출발해 30년 만에, 국제영화제작자연맹(FIAPF)이 공인한 세계 17개 'A-리스트' 영화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 선정은 축하의 대상이기 이전에, 부산영화제가 마주한 구조적 결함과 지속가능성을 묻는 냉혹한 '성적표'에 가깝다.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BIFF)집행위원장은 이번 'A-리스트' 선정을 '불합리한 기준의 정상화'이자 '부산국제영화제의 실질적 영향력에 대한 공인'으로 정의했다. 16일,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 만난 그는 A-리스트라는 '훈장'을 들고 기뻐하기보다, 그 훈장이 가져올 '책무'와 '권리'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형식에 갇혔던 세계 영화계, 비로소 부산의 '실력'을 봤다"
◆ FIAPF가 이번에 인증 체계를 전격 개편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 "올해 초 베를린 영화제에서 플로레스 FIAPF 수석 디렉터를 만났습니다. 요지는 명확했어요. 기존의 '경쟁 부문' 위주 등급 분류가 현재의 국제 문화적 영향력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거였죠. 사실 그동안 우리와 토론토 영화제 같은 곳이 A급에 포함되지 않았던 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 부문 경쟁'이라는 형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론토는 북미 최대 시장이고 부산은 아시아의 허브죠. 연맹도 이 불합리함을 인지하고 안시(애니메이션), 클레르몽페랑(국제단편영화) 등 각 분야의 '실질적 맹주'들을 A-리스트로 끌어올린 겁니다."
◆ A-리스트 선정 기준 중 '마켓(ACFM)'의 성과가 주요 지표였다고 합니다.
◇"마켓이 흥한다는 건 영화제 전체의 에너지가 산업적으로 선순환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FIAPF가 요구한 작품 선정의 질, 산업 연계, 언론 영향력 등 4대 지표에서 부산의 마켓 역량은 독보적이었습니다. 형식을 넘어 '실질적인 영향력'이 등급을 결정하는 시대가 온 것이고, 부산은 이미 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계 17대 영화제인데 예산은 1/3 토막… 이제 상향 표준화 요구해야
◆ 'A-리스트' 등극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어깨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특히 매년 삭감되는 예산 문제가 영화제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습니까?"
◇글로벌 위상은 공인받았는데, 우리 내부적으로 개선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죠. 특히 매년 들쭉날쭉한 예산은 영화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이번 선정이 저희에게 고무적인 건, 이제 정부나 부산시에 '우리가 이 정도 수준의 영화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안정적인 지표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글로벌 인준'을 받은 만큼 그에 부합하는 안정적 지원과 처우를 요구하는 근거로 삼을 것입니다."
◆당장 올해부터 집중하실 변화는 무엇입니까?
◇"갑자기 프로그램을 뜯어고칠 순 없지만, 작년에 신설한 경쟁 부문의 질을 높이는 데 사활을 걸 겁니다. A-리스트 영화제로서의 의무감이죠. 단순히 상영작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부산이 선택한 영화가 곧 세계적인 기준이 된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영화의 미래는 안갯속, 영화제의 소임은 선명하다
◆ OTT 전성시대에 '영화' 매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계속됩니다. BIFF는 OTT 영화를 선제적으로 수용해 왔는데, 앞으로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보시나요?
◇"사실 영화의 개념을 규정하는 문제는 아직 과도기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영화제 관객과 일반 극장 관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작년 한국 영화계가 최악이었음에도 부산영화제 관객 수는 오히려 12.8% 늘었습니다. 17만 명 가까운 관객이 영화제를 찾았죠. 영화제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문화적 혜택과 이벤트가 결합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제의 존재 이유를 관객의 '발길'에서 찾으시는 거군요.
◇"네, 그래서 한국 영화인들에게 늘 말합니다. '이곳에 와서 프로모션하고 작품의 가치를 설파하시라'고요. 관객들이 영화제에서 얻은 감동을 들고 다시 집 근처 극장으로 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영화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소임입니다."
인터뷰 말미, 정 위원장은 부산 영화제만의 '진짜 힘'은 관객에게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부산 관객들은 ~척 등이 없습니다. '허세'없이 진짜 궁금한 것을 가감없이 묻습니다. 부산영화제를 찾는 전 세계 영화인들은 그 질문의 힘을 가장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말하곤 합니다."
영화계 안팎에서는 FIAPF의 'A-리스트'는 도착점이 아니라 더 엄격한 관리를 요구하는 '책임 목록'으로 인식한다. 이제 BIFF는 단순히 아시아 최고라는 수식어에 안주할 수 없게 됐다. 칸과 베를린이라는 준거 집단과 비교되는 '글로벌 파트너'로서의 기획력과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자유로운, 끊임없이 양질로 성장하는 영화제라는 숙제를 안게 됐다.
오는 10월 6일 막을 올릴 제31회 영화제는 부산이 화려한 레드카펫 뒤에 숨겨진 들쭉날쭉한 예산편성과 고질적인 인력문제, 전문인력 수급,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UCCN)의 '영화 창의도시' 위상을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세계 영화계는 이제 부산을 '유망주'가 아닌 '주전 선수'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