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국내 산업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한국은 대(對)중동 수출 비중이 크지 않아 단기적인 실물경제 타격은 제한적일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국제 유가 급등과 글로벌 물류망 차질로 산업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급증하던 화장품·가전·바이오 등의 중동 수출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호르무즈 해협 사실상 봉쇄…韓 경제 단기 충격은 제한적
4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정부 등에 따르면 현재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사실상 봉쇄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반관영 ISNA통신을 통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려는 모든 선박을 불태울 것"이라고 위협한 것으로 알려졌다.산업부 관계자는 "실제 해협 봉쇄 조치 여부는 추가로 확인 중이지만, 원유 수송선 등 주요 선박이 드나들지 못하는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 인근을 운항 중이거나 체류 중인 국내 해운사 소속 선박은 30여 척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호르무즈 봉쇄가 한국 경제에 미칠 단기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관측된다. 산업부에 따르면 한국의 이란을 포함한 중동 지역 수출은 지난해 기준 전체의 3% 수준에 불과하며, 이란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문제는 에너지 수급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석유 물동량의 약 20~30%가 통과하는 핵심 수송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기준 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이 전체의 69.1%에 달하며, 이 가운데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난다. 천연가스(LNG) 수입량의 약 30%도 이 해협을 통해 들어온다.
정부는 현재 석유와 가스 비축량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국내 원유 비축량은 약 1억 배럴로 117일분에 해당한다. 민간 비축분까지 합하면 200일 이상을 확보하고 있다. 이란 사태 관련 범정부 긴급대책반을 맡은 산업부 양기욱 산업자원안보실장은 긴급회의에서 "현재 석유와 가스 비축량은 충분하다"며 "LNG의 경우 카타르산 등 중동산 비중이 20% 미만이어서 당장 수급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장기화 땐 '유가·물류비' 충격…"스태그플레이션 우려"
문제는 봉쇄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다.
최근 국제유가는 미국과 이란 간 갈등으로 올해 들어 20% 가까이 상승했다. 북해산 브렌트유는 지난달 27일 배럴당 72.48달러로, 지난해 7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에서 마감했다. 업계에서는 봉쇄가 길어질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15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영국 투자은행 바클리스는 "공급 차질 우려가 현실화할 경우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관측했다. 스웨덴계 금융사 SEB는 150달러 가능성도 제시했다.
LNG 가격도 상승세다. 동북아시아 천연가스 가격 지표인 LNG 일본·한국 마커(JKM)는 전날 100만BTU(영국열량단위)당 15.068달러를 기록해 전장 대비 약 40% 급등했다.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제조업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에도 부담이 커진다. 한국무역협회는 국제유가가 10% 상승할 경우 수출 단가는 2.09%, 수입 단가는 3.15% 각각 오를 것으로 분석했다. 이에 따라 제조업은 0.68%, 서비스업은 0.16%의 생산비용 부담이 늘어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협회 관계자는 "오만 살랄라·두쿰 등 우회 항로를 활용할 수는 있지만, 해상 운임이 기존 대비 최대 50~80% 상승할 수 있다"며 "육로 운송과 국경 통관 절차 등으로 운송 지연도 최대 5일가량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유와 직결된 정유·석유화학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정유업계는 단기적으로 정제마진 개선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유가 상승이 장기화할 경우 수요 둔화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대한석유협회 조장은 대외협력팀장은 통화에서 "고환율과 물류비 상승으로 원가 부담이 이미 가중되고 있다"며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해 중동산 원유 도입이 어려워질 경우에 대비해 대체 원유 확보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체 공급처로는 미국산 원유 등이 거론된다.
구조 재편을 진행 중인 석유화학 업계 역시 원재료 가격 상승으로 실적 반등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수요 위축으로 유가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충분히 전가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산업용 전기요금도 유가 상승에 따라 추가 인상 가능성이 있다.
서강대 허정 경제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정부가 원유를 200일분 비축했다고 하더라도, 해협 봉쇄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 국제유가는 이미 크게 상승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그 시점에서 추가 비축이나 공급처 전환은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물류비 상승 역시 수출 경쟁력을 잠식할 수 있다. 항공업계는 항공유 가격 상승에 따른 유류할증료 인상으로 화물·여객 운송 비용 증가가 불가피하다. 항공유는 항공사 영업비용의 약 30%를 차지해 유가 급등 시 실적 악화로 직결된다. 해운업계도 보험료 상승과 우회 항로 선택으로 운송 기간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전체 수출 비중은 크지 않지만, 빠르게 성장하던 중동 시장 수출길이 막힐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K푸드·가전·화장품·바이오 등 최근 수출이 급증한 품목의 시장 확대 모멘텀이 꺾일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동 국가들과 진행 중인 방산·자동차 프로젝트 역시 중동 정세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최근 다수의 한국 기업은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 등이 추진하는 국가 주도 프로젝트에 다수 참여하고 있다.
허 교수는 "초기에는 단기전에 그칠 것이라는 낙관론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장기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라며 "현 상황이 오래 지속될 경우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