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관세 정책이 국가별로 일괄 과세하는 '상호관세'에서 각종 무역법을 활용해 특정 전략 품목을 타격하는 '품목별 관세'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통상 테이블에서 주요 품목에 대한 협상력이 중요해진 가운데, 한미 통상의 핵심 비관세 장벽 이슈인 구글과 쿠팡의 운명이 엇갈렸다.
정부는 구글 지도 데이터 반출을 전격 허용하며 미국에 유화 제스처를 보냈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날 한국 당국의 고강도 제재를 받은 쿠팡이 시장 기대치에 못 미치는 실적을 발표하면서 미국 측의 통상 압박 명분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주요 한미 통상 현안이 엇박자를 내면서 향후 협상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10년 만에 구글 지도 전격 반출…디지털 무역 장벽 허물 '강수'
28일 국토교통부와 통상당국 등에 따르면 국토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은 전날 유관 부처로 구성된 '측량성과 국외 반출 협의체' 회의를 열고, 구글이 신청한 1대 5000 축척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국외 반출을 승인했다. 2016년 국가 안보와 지리 정보 유출 우려를 이유로 불허 결정을 내린 이후 약 10년 만에 전격 빗장을 연 것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축척 1대 2만5000 미만의 대축척 지도는 정부 심사를 거쳐야 반출할 수 있다.
그동안 구글은 한국 내 서버 설치 없이 글로벌 표준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정밀 지도 반출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정부는 군사시설 및 국가 보안시설 표기 문제 등을 이유로 이를 거부해 왔다. 지난해 2월에도 구글의 반출 요구에 대해 심의를 미루며 수차례 결정을 연기했다.
이번 반출 승인은 안보 논리보다는 최근 진행 중인 한미 통상 협상에서의 협상력을 고려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앞서 미 무역대표부(USTR)는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NTE)'에서 한국의 지도 데이터 반출 제한을 대표적인 디지털 서비스 무역 장벽으로 지목했다.
지난해 말 한미 관세 합의 팩트시트에도 "디지털 서비스와 관련된 법률 및 정책, 특히 망 사용료 및 온라인 플랫폼 규제와 관련해 미국 기업이 차별받지 않도록 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결국 정부가 미국의 비관세 장벽 해소 요구를 일부 수용함으로써 자동차와 반도체 등 핵심 품목 관세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한 것으로 분석된다.
쿠팡, 시장 기대치 하회… '규제 리스크' 부각에 美 의회 반발
구글 지도 반출이 허용된 같은 날, 미 뉴욕증시(NYSE)에 상장된 쿠팡 모회사 쿠팡Inc는 시장 기대치를 크게 밑도는 실적을 발표했다. 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115억원으로 전년 동기(4353억원) 대비 97% 감소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과징금이 반영됐던 2024년 2분기를 제외하면 2022년 3분기 흑자 전환 이후 최저 수준이다. 연매출과 연간 영업이익은 증가했지만 시장 예상치에는 못 미쳤다.
쿠팡의 실적 둔화 배경으로는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따른 신뢰 하락과 정부의 제재가 거론된다. 개인정보 유출 이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국토교통부, 금융위원회, 경찰청 등 관계 기관이 전방위 조사에 나섰다. 공정위는 26일 쿠팡에 대해 대규모유통업법 위반 혐의로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21억8500만원을 부과했다.
문제는 미국 정·관계가 쿠팡 사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 연방 하원 법사위원회는 23일(현지시간) 해럴드 로저스 쿠팡 한국법인 임시대표를 불러 7시간에 걸쳐 한국 정부의 제재 조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일부 보좌진은 한국 정부의 차별적 대우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질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쿠팡이 최근 수년간 150억원을 들여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여왔다는 점에서, 이번 청문회 역시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성격이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쿠팡의 실적 둔화를 한국 정부 제재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미국 측이 이를 통상 압박의 논리로 활용할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미국이 무역법 301조(불공정 무역행위 조사 및 보복) 적용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301조가 발동될 경우 최대 4년간 상한 없는 관세 부과가 가능하다.
美 품목별 관세 압박 속 '엇박자'…통상 협상 변수
구글과 쿠팡을 둘러싼 상반된 흐름이 향후 한미 통상 협상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상호관세가 연방대법원에서 위법 판단을 받은 이후 무역확장법 232조와 무역법 122조, 301조 등을 활용한 품목별 관세 체제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 특정 품목이나 산업을 겨냥한 '정밀 타격' 전략이다. 미국 기업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되는 사안을 지렛대로 삼아 압박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구글 지도 반출 허용과 쿠팡 제재는 통상 측면에서 엇박자로 해석될 수 있다. 구글 지도 반출은 비관세 장벽을 완화하는 카드인 반면, 쿠팡에 대한 고강도 제재와 실적 둔화는 '한국 내 플랫폼 규제 리스크' 인식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쿠팡 사안을 빌미로 무역법 301조 카드를 꺼낼 경우 파장은 작지 않을 수 있다. 301조는 광범위한 보복 관세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쿠팡 사태를 지렛대로 삼아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을 압박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엄정 대응은 불가피하지만, 통상 이슈로 확전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전략도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몽둥이도 모자라다', '한국에서 떠나라', '파렴치하다' 등 일부 정부 인사들의 강경 발언이 미국 측에 부정적 시그널로 해석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서강대 서정 경제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쿠팡 사태가 통상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협상 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향후 미국 측이 한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쿠팡을 비롯해 여러 품목들에 대해 조목조목 얘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