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부탁이 있어요."
지난 12일 대구 자택에서 만난 이용수 할머니(98)의 왼쪽 뺨에는 까만 멍이 남아 있었다. 며칠 전 집에서 넘어지며 생긴 상처다. '어쩌다 넘어졌느냐'고 묻자 그는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졌겠냐. 요즘 자꾸 어지러워서 자주 넘어진다"고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 내내 할머니는 '마지막'이라는 말을 여러 번 꺼냈다. 나이를 묻자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많습니다. 아흔이 넘었습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구십여덟입니다."
그는 1992년 피해 사실을 공개한 이후 일본, 미국 의회 등을 오가며 전쟁 성폭력 문제를 증언해 왔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 집회에 참여했고, 세계 각국에서 강연과 증언을 이어왔다. 다큐멘터리와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며 기억을 기록으로 남겼다. 피해자로 시작된 삶은 활동가로 이어졌고, 이제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됐다.
그는 이날도 '말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파운데이션을 왼쪽 뺨의 멍 위에 덧바르고, 진달래빛 립스틱을 입술에 발랐다. 단정한 귤색 한복을 갖춰 입고 두 손을 모은 채 거실 소파에 앉은 그는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흔여덟의 증언자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가사 속에 남은 기억…"죽을 때 노래 세 곡 가져갈 것"
뺨에 생긴 멍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것이다. 그러나 가슴에 남은 상처는 흉이 되어 남았다. 만 나이 열두 살, 일본군에 끌려갔던 기억이다."처음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특공대, 가미카제 부대였어요."
끌려간 장소를 찾게 해준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노래였다. 열두 살 때 일본군이 '나는 내일 죽으러 간다'며 불러줬다는 노래다. "전폭기는 떴는데 대만은 멀어진다… 쿵덕쿵덕 구르는 소리에 아무도 배웅해 주는 사람은 없지만, 울어줄 사람은 요시꼬 한 사람뿐이다."
노래를 부른 일본군은 그를 '요시꼬'라고 불렀다.
"밤하늘엔 별이 창창했어요. 제가 별을 가리키면서 '저 호시(별)를 우리 엄마 아버지도 볼까'라고 물었더니 군인이 그러더라고요. '물론이지. 너희 엄마 아버지도, 우리 엄마 아버지도 본다.'"
노래 속에는 그가 끌려갔던 장소가 담겨 있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머물렀던 곳은 대만 신주(新竹). 지금은 공군기지가 들어선 자리다. 그는 이후 직접 대만을 찾아 그곳을 확인했다.
할머니는 이 노래를 "죽을 때도 가져갈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가 삶의 끝자락까지 붙잡고 싶은 노래는 두 곡이 더 있다. 하나는 '귀국선'이다. 해방 이후에도 대만에 머물다가 1946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 들었다고 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깃발을…."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듬해인 1992년, 이용수 할머니도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할머니는 1994년 당시 일본 법무성 장관이었던 나가노 시케토의 '위안부는 공창(公娼)이었다'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고, 2000년 도쿄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증언했다. 2007년에는 미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일본군 성노예 제도의 실상을 증언하며 일본의 공식 사죄를 촉구했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수요 집회 현장에도 꾸준히 섰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제작 과정에도 참여하며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힘을 보탰다. 피해 생존자에서 증언자로, 다시 운동가로 이어진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마지막 세 번째 곡. 수요집회 현장에서 자주 불렀던 민중가요 '바위처럼'이다.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참 귀했던' 소녀상이 '표적'으로…"말로 못 하는 아픔"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 생존자들의 오랜 싸움 끝에 세워진 것이 평화의 소녀상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사람들이 정말 귀하게 생각했어요."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일본의 공식 사죄를 요구하며 매주 열려온 수요 집회 1천회 개최를 기념해 만들어진 상징물이다. 소녀상은 피해 생존자들의 고통과 기억, 그리고 연대를 상징한다.
하지만 지금 그 상징은 끊임없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 단체는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며 집회를 열고, '위안부는 사기' '위안부는 매춘 여성'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에 국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부인하거나 왜곡하고 피해자를 모욕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ㆍ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
최근 일부 단체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는 상황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말로는 못해요. 말로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힘겹게 말을 이었다.
"더 산다 해도 사는 게 참 힘들어요. 해결이 돼야 하는데…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우리(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가 피 빠지게 했는 거 알아주지도 않아요."
그는 위안부 문제를 유엔 고문 방지위원회나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과 법으로 하자고 했어요. ICJ로 가자고 했는데 일본이 안 갔어요. 고문방지협약으로 가자고 해도 안 했어요."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단절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 해결' 이후의 교류를 원한다고 말했다.
"빨리 완벽하게 해결하고 일본하고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학생들이 왕래하면서 역사를 배우고… 그게 제 소원입니다."
"벗 같은 대통령…마지막으로 만나고 싶다"
인터뷰 말미, 할머니는 젊은 세대가 피해자들을 어떻게 기억해주길 바라느냐는 질문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지금 살기도 어렵고 자기들 일 하기도 바쁜데… 그 복잡한 할머니들 생각을 뭐 하러 하겠어요."
그러면서도 한 가지는 꼭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한다면… 할머니들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해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잠시 후 그는 뜻밖의 이름을 꺼냈다. "이재명 대통령, 만나고 싶어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나눔의 집을 자주 찾았고 자신과도 여러 차례 만났다고 했다. 그 기억 때문인지 그는 대통령을 "친구 같았다"고 표현했다.
"대통령 되기 전에는 자주 봤어요. 악수도 하고… 꼭 이기시라고도 했고."
살아오며 여러 대통령을 만났지만 지금 꼭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재명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만나서 묻고 싶어요. 예전 그대로인지… 대통령이 돼서 다른 모습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또렷하게 말했다. "일본과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세요. 저는 그걸 위해 80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먼 타국의 밤하늘 아래 별을 바라보던 소녀는 이제 아흔여덟의 노인이 됐다. 전쟁터에서 시작된 노래와 귀환의 노래, 그리고 투쟁의 노래를 품은 채 그는 여전히 말하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역사를 끝까지 붙들겠다는 다짐처럼.
그가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다는 사람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다는 부탁도 결국 하나였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완전한 해결. 그것이 그가 80년 넘는 세월을 버텨온 이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