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당 500만원' 통장 팔러 떠나 '살인마 리광호'를 만나다

[캄보디아 지옥의 재구성①]
통장 1개 500만원…한여름 공사장을 떠나 캄보디아로
걱정과 달리 환대에 안심…그렇게 '리광호'를 만나다
인신매매로 범죄단지 '웬치' 입성…지옥의 시작

대규모 스캠 범죄단지가 모여있는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시내 야경. 남성경 크리에이터
▶ 글 싣는 순서
①'개당 500만원' 통장 팔러 떠나 '살인마 리광호'를 만나다
(계속)

"좋은 일이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캄보디아에 통장을 주고 오기만 하면 된다는 동네 형의 제안. 이렇게 간단한 일만 하면 목돈을 준다는 달콤한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면서 29살 오선호씨의 인생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캄보디아로 떠날 당시만 해도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5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피의자 오선호'가 되어 있었다. 가족을 만날 새도 없이 곧장 유치장 그리고 구치소에 수감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되돌릴 수 없는 선택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그에 따른 책임도 온전히 그의 몫이다.

"통장 팔래?" 꿀 같은 제안에 비행기 올라

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살던 선호(현 나이 30)씨는 용접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방황하던 시기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사기나 절도로 재판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아들이 태어나면서 새 삶을 살겠다는 의지도 다졌다. 하지만 아들이 두 살이던 무렵, 아내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초,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건설 현장에서 땀 흘려 일을 마치고 난 뒤 동네 편의점에서 A씨를 만났다. 한때 일을 같이했던 이른바 '동네 형' A씨에게 선호씨는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아이는 커서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어가고, 모아둔 돈은 없고. 전형적인 아빠의 고민이었다. 이에 A씨는 솔깃한 제안을 했다.

"통장 팔래?"

A씨는 사실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안산 일대에서 이른바 MZ 조직폭력배들과 어울리며 '대포통장 모집책'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A씨의 제안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A씨 : "통장을 들고 가서 주고 오기만 하면 돼. 일주일이면 끝나."
선호 : "불법 아니야? 한국에 돌아왔을 때 문제가 될 것 같은데…"
A씨 : "이미 캄보디아 경찰에 미리 작업을 다 해놨지. 그리고 통장을 빼앗겼다고 하면 그만이야."


제법 그럴싸한 설명이었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다니. 심지어 '장값' 500만 원. 통장을 '장'으로 부르는데, 통장 1개당 500만 원을 준다는 것이었다. 뜨거워지는 6월의 태양 아래서 땀범벅이 되도록 일을 해도 벌기 어려운 목돈을 일주일 만에 벌 수 있다는 유혹을 차마 떨쳐내지 못했다.

A씨 : 주변에 같이 갈 친구들도 있어?

당장 집에서 동거하던 친구 김종우(가명)씨가 떠올랐다. 선호씨도 뛰어든 일에 종우씨도 거부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두 친구는 캄보디아에서 통장을 팔기로 결심했다. 장값은 통장을 무사히 캄보디아에서 누군가에게 전달만 하고 돌아오면 준다고 했다.

오선호씨의 8세 아들과 아버지 모습. 아들은 현재 오선호씨의 어머니가 돌봐주고 계신다. 아버지 제공

선호씨의 피의자 신문 조서를 보면, 그는 마지막까지 통장 판매를 고민했다. 위험한 일에 연루될 수 있다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 그리고 지적장애가 있는 형도 생각이 났다고 한다(선호씨 아버지의 증언). 그렇게 가족을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캄보디아 출국을 준비했다.

물론 중간에 한 차례 거부의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미 선호씨와 종우씨의 통장을 들고 캄보디아로 먼저 떠난 A씨 측은 이미 일정을 정해놨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갑자기 빠지게 되면 호텔 숙박비용 등을 물어내야 한다며 출국을 압박했다고 한다.

결국 선호씨와 종우씨는 휴대폰 2대, OTP(일회용 비밀번호 인증) 카드를 챙겨 2025년 6월 27일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떠나서는 안 될 여정이 시작되면서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장주 분들이시구나" 친철한 그 남자, 리광호

오선호씨가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하자마자 이동한 식당 내부 모습. 이곳에서 선호씨는 리광호와 처음 만난다. SNS 캡처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공항에 도착하자 한국인 남성 두 명이 선호씨와 종우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A씨의 지인 박선창(가명)씨 일행이었다. 이들은 캄보디아에서 체류하며 선호씨와 같이 한국에서 넘어온 통장 대여자를 맞이하는, 이른바 '중간책'이었다.

선호씨는 이들과 함께 프놈펜의 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낯선 이들과의 식사에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말이 오가면서 조금씩 경계심이 풀어졌다. 식사가 끝날 무렵, 낯선 남성이 식당에 찾아왔다.

"장주(통장 주인) 분들이시구나"

왼쪽 팔에 문신이 새겨진 남자가 나타났다. 각진 얼굴이었지만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이 남자는 자신을 '리광호'라고 소개했다. 그의 곁에는 한국인 부하 '오반'이라고 불리는 남자도 함께 있었다. 선창씨는 선호씨에게 "이 사람(오반)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소개했다.

당시 선호씨는 리광호가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이 만남으로부터 두 달 뒤인 8월, 그가 '캄보디아 보코산 한국인 대학생 고문·살해 사건'의 주범이 된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캄보디아 범죄단지에서 한국인 대학생을 납치해 고문하고 살해한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리광호는 지난해 11월 프놈펜의 한 식당에서 현지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국가정보원 제공·텔레그램 캡처

다음 날 선호씨와 종우씨는 차를 타고 시아누크빌로 이동했다. 시아누크빌은 캄보디아 남쪽에 위치한 휴양도시로, 여러 호텔과 카지노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들은 선호씨와 종우씨도 멀끔한 호텔로 안내했다. 먼저 출발한 A씨 등 다른 장주들도 그곳에 모여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탄했다.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쉬다가 통장만 건네고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곧 500만 원도 받게 될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오히려 캄보디아에 더 머물며 일자리를 찾을 생각도 갖고 있었다(피의자 신문 조서).

새벽에 정신없이 올라탄 차량…"너네 팔린거다"

오선호씨가 묵은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중심가에 위치한 진베이 펠리스 카지노 호텔. 캄보디아 대규모 스캠 조직의 배후로 지목된 프린스그룹 소유다. 남성경 크리에이터

그러나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통장을 구해 온 선창씨 측과 통장을 구매한 리광호 측 사이에서 정산금 지급을 문제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생각보다 다툼은 격렬했다. 단순히 몸싸움 정도로 끝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리광호의 오른팔 '오반'이 격앙된 표정으로 총을 꺼내 들며 위협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무언가 단단히 잘못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선호씨 머릿속을 스쳤다고 한다. 선호씨는 "그냥 집에 가야겠다"고 했지만, 다른 장주들은 "통장 정산만 받으면 뭐가 문제겠냐"며 반대했다. 모두가 불안해했지만, 선뜻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새벽, 누군가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선창씨였다. 그는 "범죄단지 웬치가 있다. 우리가 운영하는 곳인데 지금 당장 그곳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벽이라 경황도 없고 가뜩이나 불안했던 터라 선창씨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차에 오르기 직전에서야 선호씨는 "왜 웬치로 가야하냐"고 물었다.

선창 : "지금 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거긴 안전하니 일주일 정도, 잠깐만 들어가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자"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이동하는 잠깐이 몇 개월로 이어질 줄 선호씨는 몰랐다. 웬치에 도착하자마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리광호였다.

"우리가 너네 샀다고. 너네 팔린 거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아차 싶었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웬치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마치 감금소 같은 공간이었다. 휴대전화와 여권도 모두 빼앗겼다.


선호씨는 그곳에서 곧바로 일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대신 리광호의 주관 하에 세 차례 '면접'을 봤다. 보이스피싱 상담 문구가 적힌 A4용지가 주어졌다. 면접에서 통과되면 다른 곳으로 팔려 가고, 떨어지면 그대로 남게 되는 구조였다.

선호씨는 면접에서 계속 떨어졌다. 면접과 탈락 그리고 보이스피싱 업무에 투입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폭행도 수반됐다고 한다. 주먹을 휘두른 사람은 다름 아닌 공항에서 선호씨를 환하게 맞이했던 선창씨 일행이었다. 순응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선호씨는 자수서에 썼다. (다만, 수사기관은 선호씨가 자발적으로 범죄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렇게 선호씨는 7월 초부터 보이스피싱 범죄에 투입됐다고 한다. 캄보디아 땅을 밟은 지 약 열흘 만에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된 셈이다. 그곳에서 업무 강요와 거부, 폭행이 반복되는 사이에 어느덧 시간은 흘러 9월이 됐다. 힘든 시간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던 건 함께 간 친구 종우씨였다. 그는 낯선 환경에서 걸린 임파선염으로 시름시름 앓아갔다. 통장 판매를 권유했던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유난히 마음이 쓰였다고 한다.

이 무렵 선호씨는 한국인 남성, 구모 팀장을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악연의 시작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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