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죄는 어렵다. 상사가 부당한 일을 시키면 모두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합법적인 직무권한을 행사하는 듯 애매해야 한다. 누가 봐도 시키는 게 이상한 일이라면? 법상 처벌조항이 없는 '월권'이다. 그 이상한 월권적 지시의 경우 폭행·협박이 동원됐을 때 강요죄로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재판개입 행위에 대한 직권남용죄 처벌은 특히 더 어려웠다. 사법행정권자가 재판업무를 하는 판사에 대해 어떠한 직무권한이 있느냐부터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대법원은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 없어 남용 행위에 대한 처벌도 할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최근 이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하급심의 도발적인 판결이 나왔다.
이제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숙고할 시간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까지 총 3건(피고인 8명)의 사법농단 사건이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재판개입 유죄' 처음 아니나…2심선 모두 깨져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1심(무죄)을 비롯해 그간 사법농단 사건에서 직권남용죄 성립을 부정한 판결들은 모두 이 헌법 조항을 가장 상위 판단기준에 뒀다. 법관의 재판업무는 양심에 따라 독립해 이뤄져야 하므로 사법행정권자의 어떠한 직무감독이나 지시도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직권남용을 인정해 처벌하는 순간, 재판사무를 감독·지시할 직무권한 자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법관 독립 원칙을 흔들 수 있다는 게 '무죄' 판결들의 우려였다.
처음으로 이 논리를 깬 건 2021년 3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 대한 1심 판결이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윤종섭 부장판사)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특정 사건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에 대해 명백한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하 지적 사무)은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명문의 규정은 없지만, 헌법이 '법관 독립'과 동시에 중시하는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실질적으로는 가능하고, 실제 행해지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 ▶ 2021.3.23 서울중앙지법 사법농단 첫 유죄 선고 취지 요약 |
| *'재판 독립'은 절대적인 원칙이 아님.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 원칙이나 재판은 헌법과 법률에 기속돼야 한다는 원칙과 충돌할 때 다소 제약될 수도 있음.(예를 들어 나태하거나 업무에 미숙한 판사가 명백한 실수를 계속하는 경우, 항소심·상고심을 거친다고 해서 바로잡기 어려우므로 적절한 지적이 필요할 수 있음.→이번 판결에서는 이를 '지적 사무'라고 칭함.) *실제로 재판 독립과는 충돌하는 다른 헌법상의 원칙을 보장하기 위해 법관의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는 한편 대법원장이 인사권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 장기미제사건 처리 등 특수한 경우에 한해 사법행정권자의 일정한 '개입'도 인정하고 있음. 이처럼 이미 재판 독립과 충돌하는 여러 장치들이 있는데 '지적 사무'만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짐. *다만, 단순히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 어떤 방향으로 처리할 것을 '권고'해서는 안됨. *직권의 범위를 협소하게 해석해 직권을 마음대로(재량적) 남용하는 것뿐 아니라 직권 범위를 다소 넘어서서 월권을 행사하는 식으로 남용하는 것 역시 직권남용에 해당함.(다만 월권의 범위는 직권에 속하는 사항과 상당히 관련된 범위로 제한됨.) 참고 기사: [법정B컷]'사법농단'이라더니 중형 아닌 집행유예…왜? |
다만 이민걸·이규진 사건 역시 2022년 1월 2심에서 일부 유무죄 판단을 뒤집으면서, 재판개입 관련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선 성립하지 않는다고 결론 냈다. 같은 해 4월 대법원 2부는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의 재판개입 혐의 사건 상고심에서 '재판개입 직권 없이 남용 없다'는 논리를 승인하는 취지로 무죄를 확정했다. 당시 소부 주심은 민유숙 대법관, 재판장은 천대엽 대법관이었고 조지연·이동원 대법관도 심리에 참여했다. 이듬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1심에서도 같은 취지로 무죄가 선고됐다.
양승태 2심도 "사법행정권자, 법관 등에 일반적 직무권한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에겐 '재판개입 유죄' 판결이 하나 더 주어졌다. 이 판결은 임 전 차장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앞선 대법원 소부 판결이 "일반적이고 확립된 법리가 아니"라며 배척했다. 정면승부인 셈이다.다만 재판개입에 대한 직권남용이 성립한다는 근거는 이민걸·이규진 사건 1심 때와 다소 다르다. 서울고법 형사14-1부(박혜선·오영상·임종효 고법판사)는 "사법행정권자는 국회와 헌법재판소 등에 대한 대외관계업무, 헌법과 관련된 사법지원 및 사법정책 관련 업무 등을 수행하기 위해 법관 등 관계 공무원을 지휘·감독하고, 이들을 상대로 필요한 정보의 제공 및 협조 등을 요청할 수 있는 일반적 직무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민걸·이규진 1심이 재판 독립 원칙이 현실에서 어떻게 양보·조절되는지를 드러내며 직권남용의 성립 가능성을 보였다면, 양승태 2심은 사법행정권자가 재판사무를 하는 법관에게 '절대 아무 협조도 구할 수 없다'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고 짚는다. 구체적 재판에 관련된 직무권한은 당연히 없지만, 국회와 헌재, 헌법 등과 관련한 업무 수행의 과정에선 직무수행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당 재판부는 직권남용 성립을 인정하면서도, 검찰의 47개 공소사실 중 국회와 헌재 연관성이 깊은 혐의 2개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했다. 서울남부지법에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결정 취소를 요구한 사건과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지위확인 소송 1심 결과를 뒤집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이다.
또 재판부는 "법관은 재판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사법부 소속 공무원으로서 사법행정권자의 직무명령에 응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며 "사법행정권자가 형식적, 외형적으로 그 직무권한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재판관여 행위를 하는 경우, 개별 법관으로서는 이중적 지위 중 어느 지위에서 대응해야 하는지가 언제나 분명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일선 법관들도 의견 엇갈려…대법, 전원합의체 열까
사법행정권자가 법관에 대해 일반적인 직무권한을 가지느냐에 대해선 일선 법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수는 '재판에 개입할 직권'을 인정하면 사법의 신뢰가 위태로워진다는 데 공감하지만, 이미 현실에서 재판개입이 벌어져 사법 신뢰가 흔들린 마당에 재판 독립을 성역화 해 처벌할 수 없게 한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직권남용이 아니라 국회가 재판개입과 관련한 죄목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CBS노컷뉴스와 통화한 A법관은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요구도 들어본 적 없다. 재판에 개입할 직무상 권한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고, 반면 B법관은 "'윗분'들과 어떠한 업무상의 소통도 금지되느냐 한다면 그렇지 않다. 직권이라는 것을 무자르듯 재판에 한해서만 차단하는 것이 더 비현실적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같은 입장차는 양 전 대법원장 2심 재판부가 '유사한 직권남용'이라며 예시로 든 판례들에 대한 반박으로도 이어진다. 2심 재판부는 '정치관여 행위 금지'가 법상 명시된 국정원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직원에게 그러한 업무를 지시해 직권남용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건을 판결문에 사례로 적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원 전 원장은 기관장으로서 국정원 직원에 대해 일반적·포괄적인 업무감독·지시권한이 있다는 점에서 법원과 비교할 수 없다는 반박이 있다. 법원장은 소속 법관에게 국정원장만큼 일반적인 감독·지시권한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대법원으로 사법농단 관련 사건이 모인 상황에서 조 대법원장에겐 전임 대법원장 시절의 과오를 청산하는 것은 물론이고, 법관들간 벌어진 인식차를 좁히고 설득할 판결을 내야 할 숙제가 주어졌다.
1·2심 판단이 엇갈린 이민걸·이규진 사건은 대법원 3부에서 심리 중이다. 해당 소부는 재판개입이 아닌 행정처 내부 직권남용 등에 대해서만 유죄가 선고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건도 맡고 있다. 이민걸·이규진과 함께 기소돼 1·2심 무죄 판결을 받았던 방창현 당시 전주지법 부장판사와 심상철 전 서울고법원장에 대해서도 아직 확정판결이 나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 사건도 피고인과 검찰 양측 모두 상고함에 따라 곧 대법원 소부에 배당될 것으로 보인다. 직권남용죄의 '일반적 직무권한'에 대한 해석을 두고 여러 판례가 엇갈린 상황에서 전원합의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소부 내에서 의견일치가 이뤄지지 않거나 종전 판례 변경이 필요한 경우, 국민적 관심사가 집중되고 사회적 의미가 큰 사건이 전합에서 다뤄진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직권으로 전합에 회부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