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두 자녀가 있다. 하나는 아들인데 먼저 태어났다. 그리고 두 번째로 태어난 아이는 정말 딸 구실을 제대로 해 주었다. 두 자녀를 키우면서 울어야 할 때도 지칠 때도 있었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즐거움이 점차 사라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너무 많이 낳는다는 이유로 국가가 나서 둘도 많다며 반성경적인 가족계획을 주도했고, 예비군 훈련장에서는 그 자리에서 정관수술을 하면 훈련을 면제해 주기도 했었다. 그로 인해 출산율을 줄었으니, 인구 감소로 인하여 소멸 사회로 접어들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다.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 어려워지고 산부인과와 소아과는 전공의들의 기피 대상이 되었다.
교회에서도 주일학교의 공간이 점차 넓어 보인다. 꽉 채우던 아이들이 꾸준히 줄어온 까닭이다. 이러다 주일학교가 문을 닫는다면 교회는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이렇게 희망이 기울고 있는 우리사회는 탈출구를 찾기 어려워졌다.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면서 출산을 장려하여도 쉽사리 호전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창조질서를 깨고 하나님의 복을 차버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얄팍한 계산으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복을 잃어버린 것이다. 몇 년 전부터 CBS가 나서서 출산장려운동을 펼쳐오고 있는데, 이것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우리 사회는 그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미래를 준비할 것이고 사회 역시 제대로 판단한다면 내일을 바라볼 것이다. 출산은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투자가 아닐 수 없다. 투자는 당장 비용이 들어가고 그 결과를 확신하기가 쉽지 않으나 지혜로운 투자는 반드시 그 수익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출산과 양육을 장려하는 것은 우리사회와 국가를 위한, 지혜롭고도 확실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세대가 없이는 우리의 미래도 없고, 출산과 양육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 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도 없을 것이다.
두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보며 투자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보람도 상당하다. 이들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나의 후임으로 부임한 동사목사에게는 세 아들이 있다. 든든해 보인다. 예배당에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든든해 보이고 은근히 부럽기도 하다. 나도 셋 정도는 낳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미소 짓기도 한다.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출산을 막아왔던 우리 사회는 미래의 위기를 맞고 있다. 왜 교회는 세상의 계산에 휘둘리며 성경적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그러나 그런 모습이 어디 출산 문제만일까 싶으니 더욱 답답하다. 이제라도 교회가 교회답기를 다짐하며, 교회가 세상에 대한 예언자적이고 선지자적 역할을 잃을 때 늘 위기가 왔었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본다.
이렇게 글을 쓰는 중에 마침 돌이 다가오는 손주를 데리고 딸아이가 찾아왔다. 자주 만나는 편임에도 얼마나 반갑고 즐거운지? 그리고 딸아이의 확고한 둘째 출산 계획을 들으면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데.' 그 복을 잃지 않는 딸아이가 대견스러웠다. 때로는 온 가족이 다 와서 집안을 시끄럽게 하고, 아이를 안아주는 팔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렇게 힘든 것이라면 얼마든지 즐겁게 감당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과 즐거움을 풍성히 누리려면 그만큼 우리가 할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그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 못하면서 받기만 하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딸아이가 몇 시간 편하게 쉬더니 이제 집에 간단다. 손주를 넘겨주면서 팔은 가벼워졌으나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좀 더 있다가라고 붙잡고 싶었으나, 지금 가지 않으면 귀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말에 더 붙잡지 못했다. 이런 즐거움을 우리 젊은이들이 제대로 알려나? 그것을 알 때쯤 되면 후회가 밀려오지 않을까 싶어 걱정스럽다.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 CBS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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