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구하려 징계 각오"…警의 아슬아슬한 '계좌 정지'

로맨스 스캠·리딩방 사기, 현행법상 지급정지 대상 제외
경찰 관계자 "내용 일부 생략해 계좌 정지 가능" 편법 접수
경찰·피해자 모두 부담…입법 공백에 한숨
죄명 전환·계좌 정지 반려 건수 알 수 없어…구체적 논의 불가
전문가 "악용 사례도 문제…사회적 합의 필요"



"투자나 연인 이야기는 빼고, 일단 보이스피싱으로 접수합시다"

'로맨스 스캠'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경찰 수사관에서 들은 말이다. 그 수사관은 사실대로 신고하면 즉각적인 계좌 동결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진술서에 '투자'와 '연인 등 친분 관계'라고 적은 부분을 지운 뒤 해당 사건은 로맨스 스캠이 아닌 보이스 피싱 사건으로 접수됐다. 곧바로 은행은 경찰의 계좌 지급 정지 요청을 받아들였다.

로맨스 스캠이나 노쇼 사기 등 신종사기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지만, 현행법은 오로지 보이스피싱 범죄에 한해서만 즉각적인 계좌 동결을 허용하고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27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스마트폰과 같은 전기·전자 통신수단으로 피해자를 속인 뒤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는 행위를 '보이스피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통신수단을 이용한 모든 사기 행위가 보이스피싱은 아니다. 최근 신종사기수법인 로맨스 스캠이나 노쇼 사기, 투자 리딩방 등 물건이나 서비스 등을 제공할 것처럼 속인 뒤 잠적하는 경우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또 이같은 사기 범죄들은 보이스피싱 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며, 이에 따라 계좌 동결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주식 리딩방 사기로 4천여만 원을 잃은 50대 B씨에게 법무법인측이 "보이스피싱으로 신고해야 지급정지가 가능하다"고 안내하는 이유도 이같은 맥락이다.

회원 수가 수백만 명인 사기 피해 공유 커뮤니티에서도 동일한 신고 요령이 공유되고 있다. 게시글마다 "피해 진술에 투자라고 쓰지 말라", "지인 이야기는 빼야 지급정지가 된다"는 조언이 댓글로 이어진다.

경찰이 23일 캄보디아 프놈펜국제공항에서 스캠(scam·사기), 인질강도 등 범행을 저지른 한국인 범죄 조직원들을 국내로 송환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피해자들이 사실관계를 그대로 설명하면 계좌 동결이 어려울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수사 방식은 수사관 입장에서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경찰 내부에서도 "오죽 안타까운 마음에 그러겠냐"며 "징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좌 정지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게다가 경찰청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에는 수사 종결 후 확정된 혐의만 기록된다. 초기 접수 단계에서 죄명이 변경되거나, 지급정지 요청이 반려된 사례는 별도로 집계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입법이나 법 개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 혹은 반대로 피해를 입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신종 사기 유형이 빠르게 늘고 있는 만큼, 지급정지 제도가 이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개정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오윤성 순천향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수사관들이 피해를 막기 위해 편법을 동원하는 상황은 '궁여지책'으로 보인다"며 "다양한 사기 유형을 포괄할 수 있는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지급정지 범위를 무분별하게 확대할 경우 악용 가능성도 있는 만큼, 절차와 통제 장치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오 교수는 "국회에서 입법 과정에 범죄 현상에 대한 공청회 등 목소리를 듣는 과정을 더 늘려야 한다"며 "수사관 개인이 아닌 경찰서장 승인 하에 긴급 조치를 허용하는 등 재량권의 범위와 절차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현재 국회에는 다수 피해가 발생한 계좌에 대해 범죄 유형과 무관하게 임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다중피해사기방지법'이 계류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로맨스 스캠이나 투자 리딩방 등 범죄 유형을 따지지 않고, 다수 피해가 발생한 계좌를 즉시 묶어두는 임시 조치가 가능해진다"며 "입법적 공백이 해결되어야 수사관들의 부담과 피해자들의 안타까움도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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