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멘토, 민주당의 기둥…이해찬의 73년 발자취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에서 치료 중 별세했다고 민주평통이 밝혔다. 사진은 2004년 6월 30일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국무총리 등 정부에서 다양한 요직을 맡았던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020년 8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끝으로 정계를 떠났던 이 전 총리는 자타공인 민주당계 정부와 계파를 아우르는 원로로 꼽힌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일하게 '맞담배'를 피웠던 인물, '친노 좌장'이란 수식만으로 그를 설명해내기 힘들 정도로 그의 정치 이력은 화려하다.
 
7선 국회의원이자 DJ정부의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의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 당에서도 원내부총무부터 당무기획실장, 최고위원, 당대표까지 요직을 거쳤다. 사실상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셈이다.

평생의 꿈은 '한국의 민주화',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

정치권에서는 이 전 총리의 삶을 '선공후사(先公後私)'로 표현한다. 그가 설립한 출판사 돌베개에서 펴낸 <이해찬 회고록: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2022)에 따르면 그가 평생 꿨던 꿈은 단 두 가지라고 한다. 한 가지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였으며, 또다른 하나는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이었다.
 
유시민 작가는 고인을 가리켜 "예나 지금이나 공적(公的)인 사람"이라고 했고,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제적과 구금, 투옥과 고문 등의 고난이 따랐지만 자세는 한결같았다"고 평가했다.
 
이 전 총리는 1952년 7월 10일 충청남도 청양군 벽천리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일제시대 일본에서 유학한 아버지 이인용씨는 창씨개명을 거부할 정도로 주관이 뚜렷했다고 한다. 자유당 정권 말기 지방선거에서 야당 후보로 면장에 당선될 정도로 주민 신뢰가 두터웠다고도 전해진다. 마을에서 이 전 총리는 '이 면장 댁 셋째 아들'로 통했다.
 
국민학교 졸업 후 상경한 그는 덕수중·용산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이듬해 사회학과로 과만 바꿔 다시 입학했는데, MBC 앵커를 지낸 신경민 전 의원이 동기다.
 

사회학자 꿈꿨지만…민주화운동 투신한 '72학번'

'72학번 이해찬'은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시대가 도와주지 않았다.

대학에 재입학한 해 10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배경엔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는 부친의 질책도 있었다고 한다. 교내 유인물 사건으로 수배를 당했던 이 전 총리는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고 학교에서 제적된다.
 
1980년 복학해 복학생협의회장을 맡고 나서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재구속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에서 "이 목숨 다 바쳐 이 땅이 민주화될 때까지 싸워 나가겠다.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꾸짖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2년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풀려났지만 민주화 투쟁은 지난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 재야에서 활동한 이 전 총리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도 상황실장으로 6월 항쟁을 이끌었다.
 
정계 입문은 평화민주당(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다리를 놨다. 이 전 총리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당선돼 이력을 쌓기 시작한다. 의정평가 1위를 토대로 총선에서 잇따라 당선됐고, 당에선 당무기획실장, 정책위의장 등을 지내며 주로 기획·정책 분야 일을 도맡았다.

DJ·노무현·문재인 캠프 이끈 '킹메이커'…李대통령 멘토도

1988년 3월 31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한 관악구 이해찬 후보의 유세. 연합뉴스
고인의 핵심 키워드는 '선거 전략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를 총괄해 당선으로 이끈 것이 출발점이다.

특히 대선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97년 김대중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 △2002년 노무현 선대위 기획본부장 △2017년 문재인 선대위원장 등을 지내, 대통령만 3명을 배출한 '킹메이커'로 불린다.
 
2016년 '김종인 비대위' 체제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되면서 잠시 당을 떠났다가 복당해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당대표로 선출됐다. 21대 총선에선 시스템 공천 등을 통해 300석 중 180석을 휩쓰는 대승을 거뒀다. 당시 승리에 도취돼선 안 된다는 취지로, 열린우리당 때 과반 의석을 얻고도 민심을 따르지 못해 대선·총선에서 연거푸 진 교훈을 잊지 말자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당초 민주당의 비주류였던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당선된 제20대 대선 경선 당시 조정식·이해식 등 '이해찬계' 의원들이 이재명캠프에 대거 들어갔고, 이 전 총리 역시 사실상 이 대통령 지지 의사를 표하며 힘을 실었다. 민주당의 '상왕'으로 불린 이 전 총리가 이 대통령을 밀면서, 당심도 이낙연 전 대표가 아닌 이 대통령에 쏠렸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정계 은퇴 후인 2024년 22대 총선에서는 당대표였던 이 대통령, 김부겸 전 총리와 상임공동선대위원장으로 총선 승리를 견인했고,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지난해 10월 제22기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됐다.

'버럭 해찬'에서 '민주당 20년 집권론'까지 

다만, 정치적 견해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직설적 언사와 강성 성향에 따른 평가는 갈린다.
 
민주당 대표였던 2019년 당 의원총회에서 강창일 의원이 한국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을 비판하자, 이를 멈추라는 취지에서 손가락으로 엑스(X)자 표시를 해보인 장면은 상징적이다. 참여정부 총리 때는 대정부질문에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의원들과 설전을 벌이며 '버럭 해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과거 50년 넘게 이어진 보수 우위의 국내 정치 지형을 깨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는 그의 신념은 정치적 반대 진영에겐 상당한 도전이 됐다.

그 연장선상에서 고인은 민주당이 최소 20년은 집권을 유지해야한다는 '20년 집권론'을 설파했다. 2018년 전당대회 당시 "개혁정책이 뿌리내리려면 (민주진영이) 20년 정도는 집권하는 계획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이후 여러 차례 강조했던 정치 비전이자 전략적 담론이었다. 단지 권력을 오래 잡겠다는 욕심보다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치적 안정 기간'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지지층을 결집시켰고, 정책적 자신감을 보여주었다는 당내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민주주의 원칙인 정권 교체 가능성을 무시한 독선적인 발상이라는 반대 진영의 강력한 비판에도 부딪혔다. 그랬던 그가 예상치 못하게 베트남에서 불귀의 객이 되면서 20년 집권론은 이제 그가 민주당에 남긴 유훈이 됐다.

회고록서 "못한 건 또 하면 돼…실패 아냐"

민주당 최민희 의원과 대담 형식의 최고록에서 고인이 자신의 정치인생을 뒤돌아보며 남긴 아래 어록은 시대를 풍미한 전략가이자 민주당의 기둥으로서 후대에 남기는 충고이자 유언으로 읽힌다.  

"나는 정치도 민주화운동의 연장에서 시작했어요. 민주적 정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 아직 걱정스러운 바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발전을 해온 것 같아요. 이제 DJ가 하신 말씀을 조금 느껴.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운동을 하면서 실패는 해도 좌절하지는 않잖아요. 정치를 하다 보면 목표대로 성취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못한 것은 또 하면 돼요. 실패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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