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텀블러, 장동혁의 장미[기자수첩]

지난 2023년 9월 단식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철제 텀블러에서 물을 따르는 모습. 김현정의 뉴스쇼 영상 캡처

2년 전 단식 중이던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불쑥 철제 텀블러를 집어들었다. 이어 유리컵에 물을 따른 뒤 이렇게 말했다. "맛 좀 보고 가실래요?" 휴가 중이던 기자가 야당 대표 인터뷰에 급파됐다 졸지에 '텀블러 시음'에 참여하게 된 사연이다.

농성장을 찾았던 한 민주당 의원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온병 안에 들어있는 게 뭐냐" 물론 농담이었다. 기자가 "따뜻한 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 대표는 "검증하자고 한 얘기는 아니고 그냥 재미로 한 거예요"라며 씩 웃었다.

이후 '텀블러 시음' 해프닝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고 종편 시사프로그램이 줄기차게 인용했다. 엿새째 단식 중이던 야당 대표의 비장한 결기보다 잠깐의 가벼운 농담이 더 큰 주목을 받은 것. 단식에 공감하지 못한 보수진영이나 중도층 일부의 조롱이 '텀블러'로 표상된 까닭이다.

따지고 보면 사실 이 대표 단식에 대해서도 여론은 엇갈렸다. 윤석열 정권에 맞선 '국민 항쟁'이라고 포장했지만 본인을 향한 국회 체포동의안 부결을 압박하는 '방탄용'으로 인식된 탓이다. "악어의 단식"이라던 장동혁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변인 논평이 대표적이다. 그런 냉소를 모두 투영한 게 바로 그 작은 텀블러였다.

그럼에도 그 단식에 힘이 실린 건 '생존 투쟁'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023년 9월 단식 투쟁 16일차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모습. 윤창원 기자

이 대표를 향한 검찰의 수사가 옳았는 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칼끝이 목전에 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외계인이 침공하면 한·일 간에도 손을 잡는다는데…. 검찰의 구속영장이 이 대표를 '약자' 위치에 세웠고, 비명(비이재명)계도 마냥 툴툴거릴 수만은 없었다.

이후 서사가 완성된 건 영장이 기각되면서였다. 장장 24일간의 단식에도 체포안이 가결되는 1차 반전이 있었지만, 지팡이를 짚고 힘 없이 구치소를 걸어나오는 초췌한 그에게 누구도 돌 던지지 못했다. 이 대표는 결국 '민주당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고 총선, 계엄, 탄핵을 거친 뒤 대선 경선에서 90%에 육박하는 역사적인 득표율을 기록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단식은 어땠나.

물론 2년 전 이 대표 단식과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통일교 특검, 공천뇌물 특검법 관철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으나 당 안팎에선 다른 목적(?)을 의심했다. 당내 결집을 어느 정도 이뤘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뻣뻣'하던 유승민 전 의원이나 당내 쇄신그룹이 농성장을 찾을 정도였다.

다만 장 대표에게 '약자성'을 읽어내긴 쉽지 않다. 애초 검찰이 구속영장으로 목줄을 죄지 않았고 그렇다고 측근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으러 간 적도 없다. 경쟁자인 한동훈 전 대표 제명 논란이 커지면서 입지가 흔들린다는 관측도 나왔으나, 당내 갈등을 기준으로 보면 장 대표는 어디까지나 실권자, 당권파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배달된 꽃바구니들. 김광일 기자

단식 중 난데없이 주목을 받은 건 장미 한 송이였다. 장 대표가 "나도 그도 물에 의지하고 있다"며 사즉생의 각오를 밝히자, 전국의 지지자들이 수백 개의 꽃바구니를 보내 응원에 나선 것. 그런 흐름에 장 대표 팬까페 가입자 수도 1만 명을 넘어섰다.

일주일 단식이 끝났지만 당내 갈등도 그칠 줄 몰랐다. 단식 종료 직후 "제발 정신 좀 차리자(박정훈 의원)"는 강한 비판이 따라붙을 정도였다. 외부의 '텀블러 조롱'이 민주당내 결집의 계기가 된 것과 달리, 장미는 그 이상의 작용을 해내지 못하고 로텐더홀에 머물렀다. 단식 내내 장 대표가 '강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장 대표가 드라마를 써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를 소개한다. 바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 단절하는 것이다. 단식으로 구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니 이제는 정말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도 못해낸다면 다음 기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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