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봉준호'를 찾아서…현실은 '아비지옥'

[벼랑 끝 K무비④]

봉준호 감독이 지난 2020년 2월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열린 관련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봉 감독은 이날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까지 4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연합뉴스

▶ 글 싣는 순서
① 박살난 '천만영화' 시대…숨통 움켜쥔 괴물들
② 영화로 뜬 톱배우들, 영화를 떠나다
③ '슬램덩크'가 내리꽂은 뜨거운 감자 '홀드백'
④ '포스트 봉준호'를 찾아서…현실은 '아비지옥'
(계속)

1백여 년 한국영화사에 정점을 찍은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봉준호 감독이 거론될 법하다. 대표작 '기생충'으로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 수상자로 호명될 때 느낀 희열은 여전히 선명하다.

#1. 2010년대 웬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만한 첫 작품을 내놨던 감독 A는 "이젠 영화를 떠났다"고 했다. 두 번째 작품 흥행 실패 뒤 후속작을 만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짧은 통화에서 A는 "먹고 살기 쉽지 않았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2. 규모는 작았으나 패기 넘치는 작품들을 선보인, 근래 소식이 뜸했던 감독 B는 최근까지 몇몇 드라마·광고 촬영 스태프로 일했다고 한다. 영화판이 크게 위축되면서 염두에 뒀던 후속작은 3년째 제자리걸음이다. B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봉준호 신드롬 이후 한국영화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기존 시스템이 붕괴되는 등 커다란 위기에 직면한 까닭이다. 이제는 한국영화에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때라는 목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여기에는 봉준호 감독 너머 '포스트 봉준호'를 찾아야 한다는 난제도 포함된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이원재 교수는 이를 두고 "세대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들(봉 감독 등 한국영화 거장들)이 인구 구조상 가장 많은 수의 세대를 문화적으로 대표하는 바람에 과도하게 오랜 시간을 지배했다"며 "유재석 등이 여전히 방송가 예능을 대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차세대 박찬욱 봉준호 난제…"문화 변동 에너지 부족 우려"


전 세계에서도 영화 잘 만드는 거장으로 손꼽히는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등을 잇는 차세대 명감독 발굴은, 지금 한국영화 산업 환경을 따져봤을 때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이원재 교수는 "앞으로 이들(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감독) 세대의 문화적 성격이 도전받고 대체되는 과정을 거쳐야 할 텐데, (이러한 도전에 힘을 실어 줄) 기저 인구가 적고 소비력도 낮아 전체적인 문화 변동 에너지가 부족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전망했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지난 2023년 벌인 '영화 창작자(감독, 작가) 창작환경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이 조사에 참여한 영화감독 323명 가운데 본인 작품 수입액을 적극적으로 밝힌 수는 158명, 그 평균치는 5441만원이었다.

다만 작품 수입액을 밝히지 않은 응답자가 164명으로 절반을 넘겼다는 사실은 작품 수입액이 평균치를 크게 밑돌 수 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해당 면접조사 결과 '영화 연출 경력 단절 감독' 그룹은 다른 감독 그룹과 다르게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호소가 많았다. 2019~2023년까지 5년간 참여한 작품 수 역시 모두 '1편'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던 점도 열악한 실태를 뒷받침한다.

왼쪽부터 거장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감독 초기 대표작 '박하사탕'(2000) '공동경비구역 JSA'(2000) '살인의 추억'(2003) 포스터. 각 배급사 제공

"봉준호도 재기할 기회는 있었는데…신인 성장 원천차단"


우리 시대에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등 세계적인 거장이 탄생했던 데는, 무엇보다 이들이 감독으로서 성장할 당시 한국영화계 분위기가 큰 몫을 했다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제작사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마지막까지 끝내 범인이 잡히지 않는 '살인의 추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봉준호 감독 신인 시절 작품은 장르 문법 파괴에 방점이 찍혔다"며 "우리는 장르영화로 구분했지만, 해외에서는 예술영화로 봤던 박찬욱 봉준호 감독 작품을 지원할 수 있었던 당시 한국영화계 토대가 그들을 키운 셈"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예술영화관협회 최낙용 회장 역시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박찬욱 봉준호 감독 등이 등장하던 시기 한국영화계는 대기업이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제작사와 감독 등 여러 집단의 의견에 귀기울일 때였다"며 "다양하고도 색다른 영화가 나올 수 있던 이 시기에는 박찬욱 봉준호 감독도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으로 재기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특히 "현 시점에서는 박찬욱 봉준호 감독처럼 재능을 지닌 신인 감독이 독립영화, 저예산영화를 통해 등장하더라도 성장 기회를 원천 차단당한다"며 "독립영화 한 편이 개봉하면 전국 3천 개가 훌쩍 넘는 스크린 가운데 보통 50~70개, 많으면 1백여 개를 주는데, 그마저도 고작 2주 정도만 걸리는 탓에 재능 있는 뛰어난 감독들 걸작이 묻힐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나는 영화감독이다"…'숨은 진주' 독립영화계 봉준호들


그럼에도 앞서 소개한 영진위 실태조사에 참여한 감독들 가운데 무려 90.7%가 가장 선호하는 작품 타입으로 '영화'를 꼽은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종사 분야에 관계없이 '영화 연출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는 곧 이들이 영화판에서 재능을 발휘할 기회와 대중적 인지도를 쌓을 만한 환경을 누린다면 한국영화 부활의 든든한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최낙용 회장은 "상업영화 시스템이 무너진 현실에서 색다른 영화 문법을 선보이는 독립영화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는데, 그 안에 분명 포스트 박찬욱 봉준호가 있다"며 "결국 이러한 감독들이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을 내고 대중적 호소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심재명 대표는 "지난해를 빛낸 화제작 '세계의 주인'을 만든 윤가은 감독을 비롯해 최근 독립예술영화계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감독들이 눈에 띈다"며 "이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진다면 한국영화의 내일을 책임질 젊은 감독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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