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 싣는 순서 |
| ①韓경제 떠받치는 반도체…'도약' 위해선 대전환 필요하다 ②출산율 수치에만 집착…인구 '정책' 아닌 '전략' 필요하다 ③AI·반도체 경쟁의 병목은 '전력'…에너지 전환이 성패 가른다 (계속) |
인공지능(AI)과 반도체 경쟁의 성패는 이제 기술이 아니라 전력과 에너지에서 갈리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들은 서버를 돌릴 전력 확보를 위해 원전과 재생에너지, 전력망까지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한국 역시 첨단기술을 성장 전략으로 내세웠지만 급증하는 전력 수요와 기후 대응, 지역 갈등과 노동 전환이라는 난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에너지 전환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반도체·AI 전략의 성패도 갈릴 수밖에 없다.
미국 빅테크가 재생에너지·원전·전력망 직접 챙기는 이유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가 미국 중부 전력망 계통운영사(MISO·Midcontinent Independent System Operator)와 인공지능(AI) 기반 전력망 운영 협력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져 화제다. MS는 앞서 40여년 전 노심 용융 사고로 폐쇄된 쓰리마일 원전을 재가동해 20년 간 전력을 구매하는 계약을 미 최대 원전운영사 콘스텔레이션에너지와 맺은 바 있다.아마존은 인도 카르나타카, 마하라슈트라, 타밀나두 3곳 풍력발전(총 379MW)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했다. 인도 내 재생에너지 투자 사업처를 53곳으로 늘렸다. 작년 말엔 메타가 프랑스 전력회사 엔지, 미 트리티오크클린에너지와 총 1GW 규모 태양광 전력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전력 1GW는 원전 1기 공급 규모로, 15만 대의 전기차를 동시에 충전할 수 있는 용량이다.
미국 빅테크가 이처럼 전력 확보 경쟁에 열을 올리는 건 이들이 사활을 걸고 뛰어든 AI 기반 첨단 기술개발 경쟁의 성패가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와 구글 TPU(텐서프로세서유닛)칩 확보뿐 아니라 이를 24시간 가동할 안정적인 전력 공급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 전력은 기술이 아니라 '구조 문제'가 됐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클라우드보다 5~10배 더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인구 감소로 노동력과 수요 기반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 같은 전력 투자를 감당할 사회적 여력도 함께 줄고 있다는 점이다.동시에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무탄소 전력을 늘리는 것도 숙제다. 파리협정에 서명한 197개 당사국은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전보다 1.5°C 오르지 않도록, 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발표하고 이행상황을 점검한다. 특히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가면서 재생에너지와 원전에 기반한 전력 생산을 늘려,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를 전기화하는 게 핵심이다.
AI 시대 전력 수요 폭증…재생에너지·원전 '믹스'가 관건
한국경제도 세계 각국과 주요 기업의 첨단기술 개발과 기후변화 대응 '경쟁'에 뛰어든 만큼, 재생에너지 확대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8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미래의 에너지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성장은 물론 운명도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잘 준비해 가야겠다"고 당부한 바 있다.지난해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재생에너지 중심 에너지 대전환과 이를 뒷받침할 에너지고속도로(전력 송·배전망) 구축을 123대 국정과제로 제시했는데, 연내 확정할 새 정부 첫 15개년 단위 전력수급기본계획(2026~2040, 12차 전기본)에 그 의지가 구체적인 수치로 담길지 주목된다.
앞서 지난 2024년 2월 나온 11차 전기본(2024~2038)은 2038년 연간 전력수요량을 735.1테라와트시(TWh)(2023년 546TWh)로 추산했다. 전원 구성은 △원전 35.2% △재생에너지 29.2% △LNG 10.6% △석탄 10.1% △청정수소·암모니아 6.2% △기타 5% △신에너지 3.8%로 계획한 바 있다.
이를 위해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2023년 기준 30GW에서 2038년 121.9GW까지 끌어 올리고, 신규 대형원전 2기(2.8GW)를 건설해 2037~2038년 도입하며, SMR(소형모듈러원전) 1기(0.7GW)를 실증해 2035년까지 상용화하기로 한 게 핵심이었다.
이번 12차 전기본에서는 재생에너지 보급 목표가 더 가파르게 늘 전망이다.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전환을 위해 지난해 10월 1일 출범한 기후에너지환경부는 풍력과 태양광 설비용량을 2030년까지 100GW로 확대하고, 2035년엔 160GW 이상으로 늘리는 방침을 표방해 왔다.
지난해 11월 브라질에서 열린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참석을 계기로 '탈석탄동맹(PPCA)'에 가입하며 2040년 탈(脫)석탄을 공약한 점도 에너지 전환의 속도를 재촉하고 있다. 현재 석탄 발전 설비용량은 39.1GW(2023년 기준)로, 국가 전체 발전량(2024년 수급 기준)의 28.1%를 차지해 원전(31.7%)에 이어, 가스(28.1%)와 함께 두 번째로 많다.
늘어나는 전력, 원전 없이 감당할 수 있나
무엇보다 신규 원전 건설 추진이 관심사다. SMR의 경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국가 연구개발(R&D) 사업 예산이 반영돼 있고, 기후부에서도 추진 방침을 시사한 상황이다. 문제는 대형원전 2기 건설을 위해선 적잖은 기간 찬반으로 팽팽하게 갈려온 여론을 무난히 봉합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점이다.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 기조로 국내 최초 가압중수로(CANDU) 월성1호기를 조기 폐쇄한 전례가 있는 터라, 이재명 정부로선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기후부는 지난해 12월 30일과 이달 7일 두 차례에 걸쳐 '바람직한 에너지믹스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전임 정부가 11차 전기본에 포함한 신규 대형원전 2기 건설 계획을 두고, 사회적 논의를 거쳐 국민 의겸을 수렴하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러나 실제 토론회는 참석 인원을 사전 등록자 100명으로 제한하고 현장 등록을 받지 않으면서 논란을 불렀다. 유튜브 생중계를 병행하긴 했지만, 제한된 참여 구조로 인해 공론화라는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행사장 입구에서 일부 시민활동가의 침묵 피켓시위가 제지되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토론회 내용 역시 전력·에너지 전문가와 당국자가 전력 수급 전망, 원전의 경직성과 재생에너지 간헐성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데 그쳤다. 원전 건설 여부 판단의 핵심 쟁점으로 꼽히는 사용후핵연료 처리와 안전성 문제는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기후부는 토론회에서 수렴된 의견과 함께, 신규 원전 건설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를 이번 주 실시해 11차 전기본에 포함된 신규 원전 2기 건설 계획을 12차 전기본에서도 유지할지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조사 문항과 표본 설계, 조사 방식 등을 사전에 공개하지 않기로 하면서 여론조사 결과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사안임에도, 조사 설계가 비공개로 진행되는 점을 두고 공론화 절차의 충분성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신규 원전 건설이라는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이 향후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도 있다.
전력망이 병목이다…'용인 반도체 산단'이 드러낸 전력 불균형
이처럼 공론화 과정부터 논란을 부른 신규 원전 건설 여부는 연내 결론이 날 예정이지만, 전력망 확충이라는 더 큰 난제에 직면해 있다. 전력망 확충 과제는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AI·첨단기술 개발 경쟁의 대규모 전력 수요를 감당할 양적 확충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화석연료-원전에 기반한 교류(AC) 전력망에 재생에너지를 송·배전하기 위한 변압기·인버터 설치 및 재생에너지 기반 직류(DC) 전력망 구축이다.
직류 전력망은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를 교류 변환 없이 송·배전할 수 있는 데다, 송전 과정에서 전력 손실이 적은 차세대 기술이다. 먼 바다 해상풍력이나 에너지고속도로 같은 원거리 송배전을 위해 초고압직류송전(HVDC) 기술 개발이 한창이고, 한전은 중거리 송배전이나 소규모 등 국내에 적합한 중전압(MVDC)·저전압(LVDC) 직류송전 기술 개발에도 도전장을 냈다. 에너지 전환을 전력망 관점에서 보면, 기존 인프라에 익숙한 교류 전력을 직류 전력으로 전환하는 의미도 있는 셈이다.
다만 전력망은 확충 과정에서 전자파 우려 등으로 언제든 '제2의 밀양 송전탑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미 '뜨거운 감자'가 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논란과 함께 본격화할 조짐이다. 용인산단을 위해 한국전력이 계획한 신규 송전망 7개 라인이 전북 지역을 촘촘하게 지나가는데, 멀리서 전력을 생산해 '에너지 손실'과 '지역 희생'을 감내하며 제조업 생산시설마저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수도권에서도 경기 하남 동서울변전소 증설사업이 주민 반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탈석탄의 비용은 누구에게…'정의로운 전환'의 공백
한편으로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벌어질 노동자와 지역사회의 고용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이른바 '정의로운 전환'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주요한 우려로 꼽힌다. 윤석열 정부에서 사실상 멈춰진 정의로운 전환이 실제 정책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번 정부에서도 뚜렷한 언급은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31일 태안화력 1호기 폐쇄와 함께 본격 개막한 탈석탄 시대는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생존 위기'를 다시금 되새겼다. 국회입법조사처의 '2025 국정감사 이슈분석'에 따르면, 석탄화력발전소 폐지로 인해 주변 상권과 연관 업체 노동자를 포함한 취업유발 감소 인원은 전국적으로 약 2만 5천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발전사 정규직과 달리 자회사나 지역 기반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을 위험이 매우 크지만, 이들을 위한 실질적인 고용안정 대책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정부의 정책 의지를 나타내는 일부 예산 지표가 이를 뒷받침한다. 고용노동부가 수행하는 산업·일자리 전환 예산은 2023년 154억 1천만 원에서 2024년 112억 1900만 원, 2025년 112억 원, 2026년 88억 원으로 오히려 축소됐다. 이 중 핵심 사업인 일자리 전환 지원금의 집행률은 2023년 22%, 2024년 32%, 2025년 7월 말 기준 22.6%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남겼다.
거버넌스의 부재 또한 심각한 갈등의 불씨다. 2024년 4월부터 시행된 '산업전환에 따른 고용안정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은 노동자의 참여나 지역 거버넌스 기구에 관한 조항을 결여하고 있어 정책 대응을 지연시킬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다. 현재 김민석 국무총리 직속의 '발전산업 고용 안전 협의체'와 '발전 산업 정의로운 전환 협의체'나 노동부가 구성한 전문위원회가 가동 중에 있다. 하지만 실제 이해당사자인 2차 하청 노동자들은 여전히 "의견 청취의 대상일 뿐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청와대 앞 노숙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민주노총 홍지욱 기후위기대응특별위원장은 "이재명 정부 하에서도 기업 주도와 자본 주도의 일방적인 산업 전환이 추진되고 있어, 노동자가 전환의 한 주체로서 참여하는 길은 여전히 미미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른 실직과 공동체 해체 상황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정부와 여당은 말로만 정의로운 전환에 동의할 뿐 법 제정이나 현장 대책 마련에 책임 있게 나서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한 발전원 교체가 아니라 산업 구조와 지역 경제, 노동의 재편을 동반하는 문제다. 기후 위기 대응이 경제 성장의 제약인지, 새로운 기회인지는 결국 이 전환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