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 싣는 순서 |
| ①179개의 이름이 머무는 곳, 무안공항의 시간은 아직 그날에 ②1년이 지났지만 끝나지 않았다…조사기관과 유가족, 엇갈린 12·29 참사 ③끝나지 않은 진상규명, 그 뒤편의 치유 공백…유가족의 365일 (계속) |
참사 발생 1년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은 여전히 '그날'의 시간에 갇힌 채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정신적 외상은 신체 질환으로 전이되고, 고립과 불안 속에서 일상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유가족들은 사고가 발생한 지난 2024년 12월 29일 오전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날 새벽, 꿈에 여행 간 조카가 나왔어요. 바다 위에 뭉게구름이 껴 있고 그 사이에 얘가 떠 있어요. 상반신만 보여요. 그 꿈을 꾸고 계속 잠을 못 자고 설쳤어요. 근데 몇 시간 뒤에 뉴스 속보가 뜨는 거예요."
잠옷 차림에 겉옷만 급히 걸치고 나온 가족들은 공항 대합실로 향하던 길에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활주로 인근 국도에는 비행기 좌석 시트와 캐리어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당시 국도를 이용했던 한 유가족은 "고속도로를 이용한 사람들은 그 장면을 피했겠지만, 국도로 공항에 온 이들은 볼 수밖에 없었다"며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지금도 매우 심각하다"고 말했다.
"진짜 못 살겠다"… 트라우마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유가족들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알았어요. 우리 가족들처럼 다른 가족들도 모습이 같았어요. 모두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한 손은 번쩍 들어 무언가를 막으려는 자세였어요. 불길을 막듯이요."
유가족들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혹했던 순간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눈앞에 각인된 잔상이 일상을 잠식하며 마음의 병은 깊어졌지만, 심리치료센터를 향한 발걸음은 여전히 무겁다.
보건소나 관할 동사무소로부터 월 1~2차례 안부 전화를 받고는 있지만, 유가족들은 '1주기만 지나면', '관련 법안만 통과되면'이라는 말을 되뇌며 전문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참사 1주기 전후는 유가족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라며 "진상규명이나 사회적 인식의 변화 없이 맞는 1주기는 극심한 상실감과 무력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진단했다.
마음의 상처가 신체적 고통으로 번진 사례도 적지 않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혈액 투석이나 항암 치료를 병행하며 버티는 유가족들도 있다.
김유진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지난 1년 동안 슬픔을 이기지 못한 직계 유가족 세 분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렀다"며 안타까운 상황을 전했다.
전국에 흩어진 유가족… 전담 기관은 '나주'뿐
사고 희생자 상당수는 광주·전남 출신이지만, 현재 유가족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실질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전문 기관은 전남 나주의 국립호남권트라우마센터가 사실상 유일하다.
이로 인해 지리적 거리와 수용 인원의 한계 탓에 적절한 상담이나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다.
김 대표는 "호남 외 지역에 거주하는 유가족들은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며 "무엇보다 유가족이 직접 신청해야만 치료가 시작되는 현행 시스템 자체가 문제다"고 지적했다.
이어 "외부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트라우마가 심각한 유가족을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며 "본인이 '치료 의사'를 먼저 밝혀야만 지원이 이뤄지는 행정 편의적 구조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은정 '두번째마음' 심리상담연구소장은 "국가 차원의 심리지원이 자칫 대외적 명분 쌓기용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며 "실적 중심 행정에서 벗어나, 유가족이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언제든 손을 내밀 수 있는 실질적인 치유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적 애도' 부재 속, '요청 기반 지원'의 한계
노 소장은 참사 유가족의 애도를 개인적 슬픔을 넘어선 '공적인 영역'의 문제로 규정했다. 진상규명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병행돼야 개인의 치유도 가능하다는 취지다.
노 소장은 "공적 애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심리 치료를 사적인 문제로만 치부하면 유가족에게 또 다른 심리적 부담과 부채감을 안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요청 기반 지원' 체계를 의료·심리 전문가가 직접 찾아가는 '능동적 개입'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백 교수는 "유가족이 여러 기관을 전전하지 않도록 단일 창구를 마련하고, 전담 사례관리자가 장기간 신뢰를 쌓으며 관리하는 구조가 핵심"이라고 조언했다.
일가족 9명이 한꺼번에 희생되는 등 유례없는 복합적 비극을 겪은 유가족들에게는, 기존 틀을 넘어서는 세밀하고 다층적인 접근이 절실한 시점이다.
참사 1주기 앞두고 흔들리는 유가족 심리·돌봄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유가족을 위한 심리·돌봄 지원이 필요하다는 정치권과 지방의회의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더불어민주당 전진숙 의원은 재난 이후 특정 시기에 슬픔과 불안이 심화되는 이른바 '기념일 반응'을 언급하며, 유가족들이 고립되지 않고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트라우마 회복 지원 체계가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광역시의회 환경복지위원회 정다은 의원도 내년도 예산 심사 과정에서 "유가족에게 일반 기준을 적용해 지원을 줄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참사 이후 유지돼 온 별도 지원 기준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정 의원은 심리·돌봄·일상회복 지원이 축소될 경우, 참사 1주기를 앞둔 유가족들의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2026년도 본예산안에서는 무상으로 제공되던 긴급돌봄과 통합돌봄이 소득 기준에 따른 본인 부담 체계로 전환되고, 유가족을 대상으로 한 식사지원 예산도 반영되지 않았다.
광주시가 추진하던 '1229 마음센터' 조성 사업 역시 중단되면서, 국가 책임을 명시한 '12·29 여객기참사지원법'의 취지와 현장 지원 사이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 유포나 피해자에 대한 비난을 삼가주세요. 재난을 겪은 뒤 심리적인 어려움이 있는 경우 ☎02-2204-0001(국가트라우마센터) 또는 1577-0199(정신건강위기 상담전화)로 연락하시면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이 기사는 재난보도준칙을 준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