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봄 8년 만의 신작 '인정빌라'…클레어 키건 데뷔작 '남극'

[신간]

다산책방 제공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맡겨진 소녀'로 국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데뷔작 '남극'이 출간됐다. 1999년 발표된 이 소설집은 키건이 20대에 쓴 첫 작품임에도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 등 4개 문학상을 수상하며 아일랜드 문학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남극'에는 총 15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품들은 대부분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지역 사회를 배경으로, 침묵과 억압 속에 놓인 여성들의 삶과 관계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성이 충동적인 선택을 하는 표제작 '남극'을 비롯해, 가정폭력과 성적 위계, 무력한 남성성과 그로 인해 파괴되는 일상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키건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절제된 문장으로 상처의 핵심을 드러낸다. 등장인물 상당수는 이름조차 없이 '여자', '아이', '너'로 불리며, 이는 개별 인물을 넘어 구조적 현실을 부각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유독한 남성성과 그 안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여성들의 모습은 차갑고 단호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이미 국내에 소개된 후기 작품들에서 보여준 연민과 온기와 달리, '남극'은 분노와 결기로 가득 찬 초기 키건의 문학 세계를 담고 있다.

클레어 키건 지음 |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344쪽


민음사 제공

소설가 김봄이 8년 만에 선보인 연작소설집 '인정빌라'는 서울 사당동의 한 다세대주택을 배경으로, 서로를 잘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을 촘촘히 그려낸 작품이다. '아오리를 먹는 오후' 이후 오랜 시간 준비한 이번 소설집에서 김봄은 한 공간에 모여 살지만 각자의 고단함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홉 편의 연작으로 엮었다.

'인정빌라'에 사는 인물들은 서로 깊이 교류하지 않는다. 이웃의 존재는 문 여닫는 소리나 복도에서 스치는 기척으로만 감지된다. 그러나 작가는 그 미세한 기척 너머에 놓인 삶의 결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가족의 병간호를 두고 갈등하는 형제, 죽은 이를 잊지 못한 채 전화를 거듭하는 노인, 상실의 기억을 안고 텅 빈 집에 머무는 인물들까지, 각자의 사연은 독립적이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된다.

김봄은 인물들을 연민이나 미화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인정 많아 보이는 인물의 이기심, 정중한 태도 뒤에 숨은 과거의 과오를 함께 드러내며, 인간의 복잡성과 모순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인물들을 이해하고 싶어지면서도 동시에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소설집 전반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빌라를 휘감은 방울토마토 넝쿨이다. 서로 얽히고설키며 자라난 넝쿨처럼, 인정빌라의 사람들 역시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채 느리게 연결된다. 기척에 머물던 관계가 잠시 포옹으로 이어지는 순간, 작가는 그 짧은 온기를 포착한다.

'인정빌라'는 이웃의 얼굴을 모른 채 살아가는 오늘의 도시 풍경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스며들고 다시 멀어지는지를 담담하게 기록한 소설집이다. 김봄은 이 연작을 통해 삶의 무게를 지닌 보통 사람들의 세계를 과장 없이, 그러나 밀도 있게 펼쳐 보인다.

김봄 지음 | 민음사 |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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