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했던 보상의 결과가 이거였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삼성전자 기흥공장 3라인에서 20년 넘게 일한 유하나(48)씨는 현재 대장암 4기 투병 중입니다. 2010년생 딸은 자폐성 장애 2급 판정받았습니다. 유하나 씨는 자신의 병과 딸의 장애가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됐던 작업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 내어 산재를 신청했지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여러 이유를 들어 피해자를 배제하는 반쪽짜리 '자녀산재법' 때문입니다.
유하나 씨가 근무했던 곳은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3라인입니다. 이 라인은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한국 사회에 처음 알린 故황유미 씨가 일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3라인에서는 노동자들이 웨이퍼를 화학물질에 직접 담갔다가 빼는 작업이 반복됐습니다. 주변 환경 역시 열악했습니다.
"베쓰에 케미컬을 부어요. 멀리서 보면 베쓰에 아지랑이가 막 올라오는데 그것도 흄이에요. 나쁜 흄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막 아지랑이 올라온다고 신기해했어요. 그 주변 벽면이 다 갈색으로 변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하나하나 모두 환경이 열악했어요." - 김지우(가명), 기흥 반도체 3라인 근무자
암 투병과 딸 돌봄을 병행하며 바쁘게 살아온 유하나 씨는 2024년, 동료의 권유로 뒤늦게 '자녀산재법'을 알게 됐습니다. 자녀산재법은 부모가 일하다 유해 물질에 노출돼 아이에게 선천성 질환이 생긴 경우,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제도입니다. 유하나 씨는 딸의 장애가 자신의 작업환경과 연관돼 있을 가능성을 그때 처음 떠올렸습니다. 퇴직 이후에도 동료들 사이에서는 "누구는 암으로 투병 중이다", "누구 아이는 발달이 늦어 치료하러 다닌다"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유하나 씨는 "여러 명이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반복되자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유하나 씨의 산재 신청 결과는 '불승인'이었습니다. 법 시행일 이후 태어난 자녀부터 적용된다는 부칙 때문입니다. 자녀산재법은 2022년 1월 제정되어 2023년 1월부터 시행됐습니다. 법 시행 이전 출생자의 경우, 시행일 전후 1년인 2022년 1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신청한 경우에만 소급 적용이 허용됐습니다. 2024년에 신청한 유하나 씨는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 애써 피해자를 배제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 법 시행일 이후에 태어난 자녀부터 적용한다면 그 이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배제하는 거잖아요. 특히나 자녀 산재는 인식하기가 되게 어렵거든요. 내 아이가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어 장애가 있는데, 내가 일했던 곳의 유해 물질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거라고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 이종란 노무사(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현행 자녀산재법은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법 조문이 '임신 중인 근로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어 아버지의 영향은 배제됩니다. 실제로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유기용제로 설비를 세척하던 한 남성 노동자의 자녀는 차지증후군(여러 장기에 선천적 기형이 나타나는 희귀 질환)으로 태어났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역학조사를 통해 업무 관련성을 인정했지만, 산재보험 급여는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법이 '아버지'의 작업환경은 산재 인정 범위에 포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억울함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와 국회는 반도체 산업 지원에만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용인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클러스터를 짓겠다는 계획과 반도체 특별법 논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화려한 성과 뒤에 가려진 직업병 피해자의 현실을, 영상에서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