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밤에 기습 선포됐던 12.3 비상계엄은 국회 의결로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산업계는 그 후 수개월 동안 극심한 후유증을 겪었다. 정치적 혼란과 국가 리더십 공백은 기업들의 경영 환경 판단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고, 대외적으로는 불안 심리와 맞물린 신인도 저하로 이어지면서 계약 취소 등 직접적 피해도 잇따랐다.
무엇보다 관세를 무기로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내란 사태 직후 출범하면서 이에 대한 치열한 대응이 기민하게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은 뼈아픈 대목으로 꼽힌다. 산업계에서는 현 정부 출범 후 미국과 관세 합의를 가까스로 이뤄냄으로써 불확실성이 줄어든 건 그나마 다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계엄 선포 '나비효과'…기업들 초비상
계엄 사태 직후 한국 경제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는 지표상으로도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4일부터 9일까지 4거래일 동안에만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시가총액은 총 140조 원 넘게 증발했다.
정부가 여러 차례 비상 회의를 열어 계엄 사태가 대외 신인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며 투자 심리를 다잡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외국인 투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여파로 원·달러 환율은 같은 기간 30원 넘게 치솟았다.
이처럼 극심한 불확실성의 터널로 갑자기 들어서게 된 대기업들은 당시 상황 전개를 예의 주시하며 잇따라 긴급회의를 소집해 금융 시장 동향과 경영 환경을 판단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시장 변동성이 심해지면서 수출과 투자 등 사업 계획 수정도 불가피했다는 게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연말에는 이듬해 사업 계획들을 세팅하고 새해부터 이를 실행해야 하는데, 시장과 정책 불확실성이 모두 확대되면서 계획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계엄 선포 후 윤석열 전 대통령에 이어 한덕수 전 국무총리의 탄핵소추안까지 같은 달에 국회에서 가결되자 재계에서는 "조속히 국정 공백이 최소화되도록 나서주기를 간곡히 호소한다"는 절박한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특히 중소기업들에게 '계엄 리스크'는 직격탄으로 작용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그해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수출 중소기업 513곳을 대상으로 긴급 현황조사를 실시한 결과 계약 지연과 감소, 취소 등 피해를 본 곳은 26.3%에 달했다.
한 중소 제조업체는 "계엄 선포일 이후, (외국) 바이어들이 논의 중이던 계약들을 지연시켰다"며 "불안정한 국내 상황으로 인해 계약 당시 약속했던 선지급금을 바이어들이 지불하기 꺼려하면서 회사 경영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무디스와 피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3대 국제신용평가사에서는 올해 1월 "정치적 불확실성이 장기화될 경우 외국인 투자 또는 기업의 의사결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 메시지가 나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관세 공세까지…산업계 '혼돈의 1년'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올해 1월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부과를 무기 삼은 보호무역주의는 기업들을 사실상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기간에 관세 정책 강화 의지를 표했던 만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조언이 이전부터 분출했지만 내란 사태로 인한 국가 리더십 공백은 대응책 모색을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 한계로 작용했다.
3월까지 이어진 최상목 권한대행 체제에서도 관련 대응을 위한 태스크포스가 꾸려지고, 미국 측과의 접촉이 있었지만 결국 관세 폭풍을 막아내진 못했다. 미국은 3월 수입 철강·알루미늄 품목 관세 25% 부과를 시작으로 6월부터는 이를 50%로 상향 조정했다. 4월과 5월부터는 한국산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에도 25%의 관세를 적용했다. 상호관세 25% 적용 예고도 이어졌다.
주력 품목들의 대미 수출이 줄고, 조 단위의 수출 기업 관세 타격이 현실화 된 가운데 6월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뒤에서야 한미 협상이 본격화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까지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응할) 총괄 컨트롤타워가 사실상 부재한 상황이었기에 협상 진척 자체가 어려웠다"는 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여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 정부 출범 후 6월 28일 한미 고위급 협상이 시작됐으며,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취임 이틀 만인 7월 23일 방미해 협상의 전면에 섰다. 같은 달 미국에 3500억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를 제시한 결과, 상호관세 15% 적용과 자동차와 부품 품목 관세 인하라는 큰 틀의 합의가 이뤄졌고 지난달 관련 내용들이 명문화 되며 숨 가빴던 협상이 일단락 됐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내란 사태가 이런 대응 타이밍을 지연시키며 산업계의 불확실성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국제통상학회장인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업 정책이 국가 리더십 공백과 연동됐던 상황이 안타깝다"며 "그런 상황이 없었다면 기업들로서는 수개월을 더 유연하게 대처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한미 합의에 따라 한국산 자동차 관세를 지난달 1일부터 소급해 15%로 인하한다고 1일(현지시간)에서야 밝혔다. 미국 시장에서 EU(유럽연합), 일본 등 경쟁국에 비해 고율 관세를 적용받으며 신음해왔던 한국 자동차 업계의 불확실성이 한층 경감되는 발표가 뒤늦게나마 이뤄진 것이다. 허 교수는 "계엄을 거치면서도 단기간에 산업계의 관세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걷혀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김정관 장관으로부터 오는 3일(미국시간) 오전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관세 인하 내용 등이 미국 관보에 게재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애 많이 썼다"고 치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