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가 산처럼 솟아 마치 산수화 풍경 같은 작품도 있다.
펼쳐놓은 그래픽이나 땅 속 지층구조의 이미지같기도 하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사진을 일일이 접어 그 단면을 특수처리한 뒤 차곡차곡 쌓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작품의 단면을 보니 수천장의 사진이 겹쳐져 있었다.
단면을 보면 나비의 몸통과 앞날개가 만나는 부분, 더듬이도 보인다.
사진을 접거나 펼쳐 새로운 형상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전병삼 작가의 개인전 '사라짐의 미학'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8일까지 열린다.
작가에게 사진은 한순간의 기록이며 시간이다. 사진을 접는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순간의 기록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새롭게 보이는 것들(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그 대상을 사라지게 해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게 추상화하는 과정을 자신 만의 방법으로 펼친다.
"책에서 기억하고자 하는 부분들을 모서리를 접어서 혹은 표시를 해서 기억하는데 그 접는다는 게 저한테는 나름대로 기억하고 싶다라는 의미이기 그래서 이것들을 이제 접어도 보고 또 접힌 사진들을 원형으로 무한대로 감아서 지름 3미터짜리 동그란 작품도 있어요. 저한테는 이 사진을 접힌 사진이 어떻게 보면 물감인 거죠."
수천장의 종이를 접어 쌓는 작업 자체가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하지만 작가는 본질에 집중해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작가의 이력도 독특하다. 홍익대학교 조소과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미국 명문인 시카고예술대학 SAIC(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미디어 아트로 미술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본격적으로 어떤 기술이 들어간 작품들을 만들고 싶어서 얼바인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컴퓨터 공학으로 두번째 석사학위를 받았다.
작가는 회화, 설치, 오브제,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작업을 이어 왔다.
180미터 정도 되는 크기의 설치 작품들로 많이 알려져 있던 작가는 10여년 전 고향집에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소장할 수 있는 작업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기존의 추상 작품은 작가도 관객도 사실은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는데 제 작품은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 대상을 얼핏 보면 보이지 않게끔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장치들을 둔 거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조금 유심히 관심을 갖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가 그 대상을 그대로 사용했다라는 거를 알게 돼요. 그래서 그 대상의 이미지를 찾는 순간부터가 실제로 이 전시를 정말로 감상하게 되는 모멘텀이 되거든요. "
실제 이 작품이 뭔지 하다가 옆의 단면을 보면 나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사진을 접어서 쌓는다는 게 저한테는 물감인 거죠. 10년 전에는 직선만 그리다가 그리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이제 어떤 형태를 그리다가 지금은 이제 자유를 찾아서 자유로운 곡선까지 진화된 상황이고 이번에 제가 쓴 대상은 우리나라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는 나비들이에요. 여기에 있는 모든 작품들은 제가 발견하고 찍은 나비 사진들이거든요. 지금 사실은 추상적인 줄무늬 안에 있으시지만 실제로는 수만 마리의 나비가 있는 곳에 계신 거예요."
2014년, 미술계에서 통섭과 기술융합이 화두로 떠오른 시점에 작가는 미래창조과학부가 발표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융합형 인재 '호모크리엔스'로 선정됐다. 2015년에는 철학자 알랭 드 보통과 함께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2021년 로스트 시리즈, 2022년 REDREAM과 MOMENT, 이어 COSMOS, BLOSSOM, 그리고 WAVE 시리즈까지, 작가는 매번 새로운 주제와 매체로 끊임없는 탐구를 이어왔다. 2023년에는 경기도 양평의 하이패밀리 내 안데르센 메모리얼파크에 길이 100미터, 높이 3~9미터 벽면에, 가로세로 20센티미터 금속 패널 6770장에 성경 구절을 새겨넣은 '성경의 벽'을 제작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패브릭 작업은 단순한 재료적 실험을 넘어, 작가의 창작 세계를 확장하고, 다음 전시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다양한 작업과 위치에서 꾸준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는 '사진조각'이라는 작업을 통해 '비로소 사라지면 보이는 것'에 대해 근원적이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패브릭 작품은 어머니를 찍은 사진을 모티프로 삼았다. 어머니의 흰머리와 눈과 립스틱을 바른 입술, 스카프를 두른 모습을 형상화한 대형 작품이다. 의상실을 하신 어머니 덕분에 단추들, 반짝이는 옷감들과 친숙한 작가에게 작품의 재료로 패브릭이 운명처럼 찾아왔다. 내년초 싱가폴에서 있을 전시에선 더 많은 패브릭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가 매 전시마다 무언가를 숨겨놨는데 숨겨놓은 거를 찾는 보물 찾기를 한다는 마음으로 전시를 보러 오시면 생각보다 되게 많은 재미난 것들을 보실 수 있고, 찾을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실제로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작품과 전시를 보는 즐거움들을 굉장히 많이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