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3 비상계엄 당시 한 수도권 부대의 행정 실무자로서 계엄 관련 업무에 관여했던 육군 간부 A씨는 '왜 나는 그때 묻지 않았고, 거부하지 못했을까'라는 자책에 자꾸만 갇힌다고 했다.
"주변에서 위로하며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군 생활이 부정된 것 같아 괴로웠고, 숨고 싶었습니다."
A씨는 당일 계엄 상황임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부의 지시를 받아 단순 연락 업무를 수행했다. 계엄 관련 업무라는 인지가 없었고, 주요 임무도 아니었기에 수사 대상에 오르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A씨를 짓누른 죄책감은 사라지지 못했다.
A씨는 '애국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군에 들어와 나름 '엘리트'로 평가돼 온 군인이었다. 그가 수년간 자부심으로 쌓아온 군 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져 수치심 속에 뒤덮인 날이 지난해 12월 3일이었다.
죄책감에 1년째 트라우마
경찰 기동대 소속 간부급 경찰관 B씨는 12월 3일 밤 갑작스럽게 여의도 국회 현장에 배치됐다. 임무는 국회 주변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계엄 상황이란 말을 들었지만 상부의 정확한 상황 전파나 지시는 없었다.몇몇 시민들과 국회의원 등이 국회로 들어가기 위해 담을 넘는 걸 봤지만 목격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왜 국회의원이 들어가는 걸 통제해야 하는 거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계엄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 모든 상황이 이해됐을 때 자괴감이 몰려왔다.
계엄 해제를 막을 뻔했다는 죄책감, 그게 계속 괴롭혔다. 주변 사람들의 눈빛에 괜히 원망과 질책이 담긴 것처럼 느껴져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트라우마'라는 걸 처음 겪도록 한 게 12·3 비상계엄이었다.
A씨와 B씨처럼 12월 3일 밤 영문도 모르고 내란 사태에 투입된 군·경만 최소 수천명이다. 수많은 군·경들이 내란의 가담자이면서 또 피해자가 됐다. 지난 9월 국가인권위원회는 12·3 계엄에 투입됐던 군 장병 15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통해 절반이 넘는 52.1%가 심리적 부담을 겪고 있다고 발표했다. 도저히 떨쳐지지 않는 죄책감과 미래에 대한 각종 불안감은 온전히 그들 몫이 됐다.
'거부한 자'들은 더욱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계엄 당시 군 지휘부에서 근무한 간부 C씨는 계엄 업무 관련 지시를 받고 "문제가 될 것 같다.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계엄 상황이 종료됐지만, 그때부터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들의 시선 속에 '너만 잘났냐'라는 비아냥이 섞여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곧 대인기피증이 찾아왔고, C씨는 스스로 동굴 속에 숨었다. 정신과에도 다녔다. 그러나 걱정할까 싶어 가족과 주변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다. 계엄은 C씨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정보사에서 휴민트로 활동해 온 한 영관급 장교 D씨는 계엄 관련 지시와 제안들을 거부했다가 각종 불이익에 시달렸다. 업무 배제 등 괴롭힘과 조직 내 집단 따돌림도 행해졌다. 계엄이 끝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D씨는 여전히 이전의 업무로 복귀하지 못한 상태로 방출 위협마저 받고 있다고 한다.
12·3 계엄은 조직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군·경 조직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육군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예비역 장성 출신 안보 전문가는 이렇게 평가했다.
계엄 때 국회 정문에서 경찰들이 국민들을 막아서고, 군인들이 무력으로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을 시도하던 장면이 TV와 유튜브 등을 통해 그대로 전파됐다. 이후 군·경의 최고위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됐고, 수뇌부 수십 명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
"검색만으로 적들이 기밀 확인…복구에 최소 수천억"
비상계엄의 후폭풍으로 군·경 조직엔 여러 개의 구멍이 '숭숭' 났다. 우선 군의 기밀에 구멍이 났다. 내란에 대한 진상 규명 등의 과정에서 군의 일급 기밀과 전시 운용 체계 등이 줄줄이 유출됐다.계엄사령관을 맡았던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은 국회에 불려 나와 변론하던 과정에서 합참 벙커, 결심지원실 등 군 일급 기밀 시설의 구조와 층수 등을 노출했다. 합참 벙커는 북한 도발과 전시 등 상황에 전쟁 지휘소로 활용되는 곳이며 결심지원실은 군 수뇌부가 주요 사안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실로 이번 12·3 계엄 이전엔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장소다.
이 외에도 수도방위사령부 관할 지휘통제 벙커인 B-1 벙커를 비롯해 여러 벙커들의 위치와 구조 등도 노출됐다. B-1 벙커는 수도방위사령부가 관할하는 곳으로, 전시 전쟁 지휘부 역할을 한다. 규모가 매우 커 수개월간 지낼 식량이 비축될 수 있다고도 한다. 이곳은 비상계염 당시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 등 주요 정치인들이 구금될 예비된 장소였다.
심지어 정보사 요원 실명까지 전파를 타고 생중계됐다. 대북 공작 및 정보 수집을 하는 역할을 하는 정보사 요원들의 이름과 신원 등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 그럼에도 777사령부와 북파공작부대(HID) 등이 수시로 거론되며 관계자들의 이름이 노출됐다. 그뿐만 아니라 기밀이 생명인 조직이나 12·3 내란으로 지휘·보고 체계, 조직 구조, 부대의 위치 등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에서 근무하며 30년 가까이 대북 정보 등을 다뤘던 한 인사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적에게 구석구석 엑스레이를 찍으라고 몸을 갖다 대 준 것이나 다름없다. 매우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실제로 북한을 비롯해 미국, 일본 등도 우리 기밀을 확보하기 위해 수십에서 수백억을 쓴다. 그런데 이제는 검색만 하면 벙커가 어딨는지, 정보사 요원 이름이 뭔지를 알게 됐다"며 "이를 복구하려면 비용으로 환산했을 때 수천억에서 수조 원이 들지 모른다. 물론 완전 복구는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임 미루는 尹과 군·경 수뇌부에 조직원들 자괴감
인사에도 구멍이 뚫렸다. 12·3 비상계엄의 여파로 장성급 군 고위직 인사 수십 명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고, 경찰에서도 최고위직인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 등이 포승줄을 찼다. 이는 곧 군·경 수뇌부의 인사 공백으로 이어졌다.이재명 정부 들어 공백을 메울 군과 경찰 고위직 인사가 단행된 건 근래다. 지난 9월 서울경찰청장을 비롯한 치안정감 5명에 대한 보직 인사 발표가 이뤄졌고, 군은 지난달 초 중장 30여 명 중 20명이 교체하는 대규모 고위직 인사가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경우 아직까지 경찰청장이 임명되지 못해 공백이 장기화되고 있다. 중간급 간부 인사도 정기 인사 시즌보다 한참 밀려나 뒤늦게 일부 이뤄졌고, '경찰의 꽃'이라 불리는 총경 인사는 연말이지만 아직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군 역시 준장·소장 진급자 발표가 미뤄지고 있다.
이처럼 12·3 내란에 대한 군·경 내부의 수습까진 한참 멀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여전히 책임에 대한 매듭이 묶이지 않으면서 조직의 혼란은 1년째 지속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명령을 하달했던 대통령과 군·경의 지휘부가 내란 혐의 재판 등에서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고 죄를 면하기에만 급급한 태도를 보이면서 명령 체계 하단에 있는 공직자들은 자괴감에 빠졌다. 이로 인해 명령 체계가 생명인 군·경 내 위계질서가 위태롭다는 우려도 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이제 더 이상 누가 상부의 지휘를 따르려 하겠나. 앞으로 복지부동하는 식의 문화가 조직 전반에 이미 퍼질 수 있다"며 "12·3 비상계엄과 관련해 명확히 책임을 져야 될 사람들이 지는 방향으로 수습이 돼 가야 조직이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찰, 계엄 가담 사과…"국민 일상 위협한 위헌·위법 행위였다"
이 모든 여파는 12월 3일 밤에 벌어진 내란 사태에서 기인했다. 가담자이자 피해자가 된 군·경은 깊은 트라우마에 빠졌고, 국민들은 이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누가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앞의 예비역 장성 출신의 안보 전문가는 "12·3 비상계엄은 국민을 지켜야 할 군과 경찰이 또다시 국민에 총부리를 겨누고 국민을 막아선, 상당히 퇴행적인 사건이었다"며 "얼마나 걸려야 군·경이 신뢰를 다시 얻고 국가 안보와 치안이 완전히 정상화될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한편 경찰은 12·3 계엄 1주기를 앞두고 비상계엄 당시 국회 출입을 통제하는 등 가담 행위를 한 것에 대해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를 어지럽히고, 국민의 일상을 위협한 위헌·위법한 행위였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1일 전국 경찰 지휘부 화상회의에서 대국민 사과를 갖고 "당시 일부 지휘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국민의 자유와 사회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경찰이 위헌적인 비상계엄에 동원돼 국민께 큰 실망과 상처를 드리고 현장 경찰관의 명예와 자긍심을 훼손했다"며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위헌·위법한 행위에 절대 협조하거나 동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