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핵심 통화 유출…'누가, 왜?' 도청 배후 놓고 파문 확산

기자명·날짜 없는 블룸버그 보도…'유출 경로' 두고 각국 정보기관 연루설
위트코프, 러시아에 '협상 프레임' 조언 정황…미국 내 '반역' 논란

연합뉴스

미국과 러시아 정상의 핵심 측근 간 통화가 전문에 가깝게 언론에 유출되면서, 도청 주체와 유출 의도를 둘러싸고 국제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대화 당사자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동 특사이자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대표 스티브 위트코프와 유리 우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외교정책 보좌관이라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향후 협상 흐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사건은 블룸버그통신이 25일(현지시간) 위트코프 특사와 우샤코프 보좌관 간 통화 내용을 입수해 보도하며 촉발됐다. 유출된 통화에는 위트코프 특사가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과 관련해 러시아 쪽에 조언을 건네는 등 친러적 뉘앙스의 발언이 포함돼 논란이 커졌다.

특히 위트코프 특사는 러시아가 2022년 이후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Donbas) 핵심 지역에 대한 사실상 영토 양보를 전제로 한 듯한 언급을 하면서, 러시아 측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어떤 방식으로 종전안을 제안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협상 프레임'을 조언하는 모습까지 보였다는 평가가 나오며 미국 내 반발이 거세다.

블룸버그는 통화 파일 출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기사에 작성자 바이라인과 날짜를 기재하지 않는 이례적인 편집 방식을 취했다. 영국 가디언은 26일(현지시간) 블룸버그의 이러한 극도의 보안 조치가 유출된 정보의 민감도를 방증한다고 분석했다.

우샤코프 보좌관은 러시아 매체 인터뷰에서 통화가 "정부 암호 채널과 왓츠앱을 통해 이뤄졌다"고 설명하며, 왓츠앱의 경우 "누군가 들을 수 있다"고 언급해 도청 가능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외신들은 이번 유출의 배후를 두고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기하고 있다.

①유럽 정보기관 개입설…"기술·동기 모두 갖춰"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 정보기관, 러시아 정부, 미국 정부 내부 인사 등 여러 주체가 후보로 거론된다고 전했다. WSJ은 유럽의 한 안보 당국자를 인용해 "이 정도 통화를 감청할 기술을 가진 국가는 수십 개국에 달한다"며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유럽 국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상당수 러시아 고위 관리들도 유럽 정보기관이 유럽 내 대러 강경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유출을 주도했을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고 WSJ은 전했다.

②러시아 내부 유출설…"크렘린 내 권력다툼 또는 전쟁 장사꾼"


러시아가 스스로 흘렸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블룸버그 보도에는 위트코프 특사와 우샤코프 보좌관의 대화뿐 아니라, 우샤코프 보좌관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특사 키릴 드미트리예프 간 통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크렘린 내부에서 드미트리예프의 역할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유출의 배경일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또한 전쟁으로 이득을 챙기는 러시아 고위층이 종전 협상을 무산시키기 위해 통화 내용을 흘렸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종전이 현실화할 경우 권력 기반을 잃게 되는 세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다.

③미국 정보기관 개입설…"CIA·NSA가 아니면 누가?"


가장 민감한 시나리오는 미국 정보기관 배후설이다. 한 전직 미 정보 고위 관계자는 가디언에 "미국 측이 유출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강하게 의심된다"며 "그렇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조직은 CIA와 NSA 두 곳뿐"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러 정책에 불만을 품은 정보기관 내부 인사가 위트코프 특사의 친러적 행보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통화를 흘렸다는 추정이다.

무엇보다 블룸버그가 녹취록이 아니라 실제 통화 음성 원본을 확보했다는 점은 원본 파일에 접근 가능한 정비기관 실무자 또는 고위 당국자가 관여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파문은 정치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파문에도 위트코프 특사를 두둔하며 "다음 주 러시아로 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WP는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종전안 압박 수위를 낮추는 등 한발 물러서는 기류도 감지된다고 분석했다.

미 공화당 내부에서는 위트코프 특사의 즉각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민주당 일부 인사들은 그를 향해 '반역자(traitor)'라는 강도 높은 표현까지 사용했다.

이번 유출은 미·러 양국 간의 '백 채널(Back Channel)' 외교 경로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는 평가도 있다. 정상 간 직접 소통이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핵심 통로인 비공식 대화가 여과 없이 공개됨으로써, 당분간 양국 고위층이 민감한 사안을 비공개로 논의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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