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기조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분위기다. 정부가 외환시장 안정 조치에 나서면서 급한 불을 끈 모양새지만, 환율은 구조적 상승 기류 속에 엔화 방향이 변수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민연금 수익성과 외환시장 안정을 조화하기 위해 국민연금의 '뉴 프레임워크' 구축을 위한 논의를 개시했다"고 밝혔다.
구 부총리는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 과정에서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 확대도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국민연금은 외환시장 단일 최대 플레이어 중에 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기재부는 보건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 등과 4자 협의체를 구성하고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에 따른 외환시장 영향을 점검했다.
구 부총리는 지난 19일에도 기자간담회를 통해 "주요 외환 수급 주체와 협의해 환율에 과도한 불확실성이나 불안정성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밖에 기재부는 최근 대형 증권사 외환 담당자들과도 비공개회의를 진행했다. 서학개미의 해외투자 확대와 관련해 달러 결제 수요가 몰리는 오전 9시 원달러 환율이 상승하는 실태 등을 확인했다.
이 같은 조치에 지난 24일 한때 1479.4원까지 치솟은 원달러 환율은 전날 1465.6원까지 내려 주간거래를 마쳤다.
다만 원달러 환율은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정책을 발표한 지난 4월 이른바 '해방의날' 1487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미국이 기준금리 인하를 재개한 지난 9월 저점인 1375.7원에서 전날까지 6.5% 넘게 올랐다. 6개 주요 통화국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가 같은 기간 96.2에서 99.6까지 3.5% 상승한 것보다 2배 가까이 더 뛴 셈이다.
원달러 환율은 엔달러 환율과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 9월 145.5엔에서 최근 심리적 저항선인 155엔을 돌파하며 한때 157.9엔까지 상승했고, 전날 156.1엔까지 7.2% 올랐다. 일본 정부가 21조 3천억엔(약 200조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하는 등 재정지출 확대에 나서면서 재정 악화 우려가 커진 탓이다.
엔화 약세가 거세지자 일본 당국이 161.96엔까지 치솟았던 2024년 7월 이후 처음으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오는 상황이다.
원달러 환율과 엔달러 환율의 '동조화 현상'은 미중 패권갈등이 원인이란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심화로 중국이 내수부양에 초점을 맞추면서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미국은 인공지능(AI) 산업 경쟁력과 관세를 무기로 영향력을 강화하는 추세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는 이런 미국에 밀착한 분위기다.
iM증권 박상현 연구원은 "미국 AI 투자 사이클의 낙수 효과를 한국, 일본, 대만이 주로 받는 구조이고 미국 관세정책에 있어서도 한국은 늘 일본과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다는 점 등은 한일 금융시장의 동조화 현상이 강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박 연구원은 이어 "특히 원달러 환율이 엔달러 환율과 연동되는 추세가 이어질 공산이 높아 보인다"면서 "대내적 외환 수급도 중요한 변수지만 원달러 환율이 하향 안정되기 위해서 엔화의 방향성도 중요한 변수"라고 강조했다.
구조적인 면에서도 원달러 환율의 추세적 상승이 불가피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원화의 가치는 외환보유액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데, 외환보유액 증가 대비 유동성(M2) 확대가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가치가 하락(환율 상승)했다는 분석이다.
한화투자증권 한상희 연구원은 "원화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며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도 없기 때문에 외환보유액이 통화 가치의 근간"이라며 "2015년부터 외환보유액의 증가에 비해 M2가 더 많이 풀리는 구조적 구간에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M2 대비 외환보유액은 2015년 168.5%에서 지난해 102.7%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외환보유액은 13% 늘어난 반면, 유동성은 85%나 증가한 결과다.
한 연구원은 "2023년 이후 한국의 경상수지는 급격하게 개선됐지만 내수 규모가 정체된 한국에서 성장이 어렵기 때문에 기업은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고 미국에 대한 투자도 늘려야 해 원화는 추세적으로 절하(약세)"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4조달러에 육박하는 세계 2위 대외순자산을 기반으로 통화 정책의 유연성을 확보했다"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길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화자산 획득을 멈춰선 안 되는 시기로 원화 가치의 점진적 하락을 받아들일 때"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