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글로벌 공급과잉으로 불황의 늪에 빠진 석유화학 업계의 구조 재편 작업 로드맵을 제시한지 약 3개월 만에 충남 대산 석화산단에서 업계 1호 자율 구조 재편안이 도출됐다. 롯데케미칼이 대산 공장 사업을 분할해 HD현대케미칼과 합병함으로써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를 감축한다는 게 골자다.
이번 재편안을 시작으로 지지부진했던 업계 자구안 마련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는 연말까지가 재편안 제출 시한임을 재차 강조하며 석화 업계에 기민한 대응을 촉구했다.
롯데케미칼 대산공장, HD현대케미칼로 통폐합…석화업계 1호 재편안 도출
롯데케미칼은 26일 산업통상부에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케미칼과 공동으로 대산 석화산단 내 사업재편계획 승인 심사를 신청했다고 공시했다. 신청된 재편안에는 롯데케미칼의 주요사업장인 대산공장을 물적분할해 HD현대케미칼과 합병함으로써 NCC 설비 등 석화 제품 생산 체계를 통폐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롯데케미칼은 "합병 이후 대산 산업단지 내 석유화학 제품 생산 기능이 단일 체계에서 운영됨으로써, 생산·공정의 일관성과 운영 안정성이 높아져 사업재편 전반의 실효성이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롯데케미칼의 대산공장 NCC의 에틸렌 기준 연간 생산량 규모는 110만톤, HD현대케미칼의 공장은 85만톤이다. 만약 합병으로 한쪽의 NCC 가동이 중단되면, 최대 110만톤 규모의 NCC 설비 감축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감축 방식은 추후에 합병 법인에서 결정될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HD현대케미칼의 지분은 HD현대오일뱅크가 60%, 롯데케미칼이 40%를 보유하고 있는데, 재편안에 따라 합병이 이뤄지면 지분율은 50%씩으로 조정된다.
'연말까지 자구안 없으면 지원도 없다'…정부 제시 '업계 재편 로드맵' 효과
이번 1호 재편안은 정부가 지난 8월 '선(先) 자구노력, 후(後) 정부지원' 방침을 밝히며 NCC 설비 감축 목표를 제시하고, 올해 연말을 자구안 제출 데드라인으로 못 박은 지 99일째 되는 날 나왔다.당시 정부는 주요 석유화학사들이 전체 최대 370만 톤 규모의 NCC 설비 감축을 목표로 연말까지 3개 석화 산단을 망라하는 사업 재편 계획을 제출하면, 진정성을 따져 종합대책을 마련해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빠른 자구책 마련 없이는 지원도 없다'는 메시지였다.
통제가 어려운 외부 변수인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석화 제품 핵심 원료가 넘쳐나는 상황이 전개되며 국내 석화업계가 공장을 돌릴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에 놓이자 불황의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강경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산업부는 이날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케미칼로부터 재편안 승인 신청을 받았다며 "재편안은 관련법에 따라 사업재편계획심의위원회에서 구조변경과 사업혁신 등 사업재편 요건 부합 여부, 생산성과 재무건전성 등의 목표 달성 여부를 면밀히 심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업재편 승인기업은 세제지원, 상법 특례 등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며 "재편 승인 시 석화산업 구조개편을 위해 부처 간 협의를 거친 세제, 연구개발, 원가절감과 규제완화 등 다양한 분야의 지원사항이 포함된 맞춤형 기업 지원 패키지도 함께 발표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재편 눈치싸움' 기류 변화 전망…김정관, 여수서 "시한 못 맞추면 각자도생"
김정관 산업부 장관도 1호 재편 신청에 대해 "정유화 석화 수직계열화를 통한 효율성 향상으로 중동, 중국의 최신 설비에 대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하며 "정부는 사업재편 적극 참여 기업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진통 끝에 석화 산업 구조 재편의 신호탄이 터지면서 관련 논의가 지지부진한 여수·울산 석화산단에서도 유사안이 도출될지 관심이 쏠린다. 그간 업계 일각에서는 "설비 통합은 각종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문제다. 기업들의 자율에 맡겨둬서는 재편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정부가 제시한 시한 내에 1호 재편안이 나온 만큼 이 같은 기류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김 장관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 같은 날 오전 여수 석화산단을 찾아 "사업재편계획서 제출기한은 12월 말"이라며 "이 기한을 연장할 계획은 없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한을 맞추지 못한 기업은 정부 지원에서 제외되고 향후 대내외 위기에 대해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9월에는 울산 석화산단에서도 "진행 중인 협의에 속도를 내 사업재편 계획을 빠르게 마련해달라"라고 석화 기업들에 촉구했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석화기업들이 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이익을 따져보는 눈치싸움이 이어져왔는데, 실제 재편안이 나온 뒤 정부가 강한 메시지까지 내놓음으로써 이전과는 분위기가 바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