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학은 근대화를 막은 '낡은 사상'이었을까, 아니면 한국 산업화의 숨은 엔진이었을까. 역사학자 백승종의 신간 '유학과 산업사회'는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들며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저자는 조선 성리학이 도덕 규범을 넘어 한국 사회의 생활철학이자 산업화의 정신적 토대였다고 주장한다. 근면·절제·책임·협동 같은 가치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배경에는 유학이 있었고, 이는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은 먼저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 논쟁을 되짚으며 서구 산업화가 직업윤리와 자기 규율에 기반해 전개됐다는 점을 소개한다. 이어 이 시선을 조선으로 옮겨, 성리학이 국가 운영과 교육·관료제·기록문화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짚는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세계기록유산이 된 것도 유학적 국가문화의 산물이라는 해석이 이어진다.
핵심 개념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자기 수양을 통해 공공성을 실현하는 인간형, 즉 성실·책임·윤리·전문성을 중시하는 태도는 산업사회에 최적화된 시민의 덕목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인의 공동체 중심 문화와 높은 교육열, 조직 내 책임 의식 등이 산업화의 압축성장을 가능케 한 기반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유학의 한계와 폐쇄성도 분명하게 다룬다. 상공업을 천시하고 국제무역을 경시한 조선의 경제 관념은 시장경제 발전을 지연시켰고, 서학·동학을 탄압한 기득권 유학자들은 혁신을 가로막아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내몰았다는 지적이다. 전통은 분명 산업화의 자산이었지만 동시에 근대화를 늦춘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한국의 산업화 성공을 '하이브리드'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유교적 윤리와 공동체 문화, 기독교가 들여온 시민의식, 서구의 합리주의와 시장경제가 뒤섞이며 '한국형 산업사회'라는 독특한 모델이 탄생했다는 분석이다. 한글 창제가 대중적 문해력의 폭발을 가능케 했고, 이것이 근대 교육과 민주주의 정착의 결정적 자산이 되었다는 평가도 곁들인다.
책은 마지막으로 유학을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 문명의 자원으로 바라본다. 대동사상이 지향하는 공공성, 구성원 간 신뢰와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 공동체적 윤리 등은 불평등과 기후위기 시대에 유효한 가치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 한국을 가능하게 한 정신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전통과 근대의 교차 속에서 한국 문명의 독자적 경로를 조명한 지적 탐구를 마무리한다.
백승종 지음 | 사우 | 3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