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대통령실과 경제 부처가 추진 중인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완화 움직임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주무부처 수장이 정부의 핵심 규제 완화 기조를 "무모한 주장"이라며 비판함에 따라, 향후 정책 추진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주 위원장은 지난 2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금산분리 완화론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는 "금산분리 원칙은 지금 우리 뿐만 아니라 미국도 그렇다(있다). 수십 년 된 규제 체제"라며 "서구에서는 100년 된 주제를 몇 개 회사 민원 때문에 바꿀 수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일부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공장을 짓는 데 다른 대안이 있으면 왜 다른 대안을 활용하지 않는가"라며 "30년, 100년 된 규제를 바꾸게 되고, 너무 무모한 주장"이라며 일축했다.
이러한 주 위원장의 발언은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지시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만난 후 "안전장치가 마련된 범위 내에서 현행 금산분리 규제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은 금산분리를 포함한 첨단 전략산업 투자를 위한 규제 완화 실무 검토에 착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관련 규제 주무부처 수장인 공정위원장이 반기를 든 모양새다.
공정위 내부에서는 당연한 발언이라고 보고 있다. 규제 기관으로서 일방적인 '금산 분리 완화' 시도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산분리 원칙은 단순한 규제를 넘어 한국 경제사의 특수성과 맞닿아 있다. 산업자본이 은행 등 금융회사를 소유할 경우, 고객의 예금을 계열사 확장을 위한총수 일가의 '사금고'로 악용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부실 계열사를 무리하게 지원하다가 금융회사까지 동반 부실화되는 시스템 리스크를 막고, 대기업 집단으로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최후의 안전장치로 여겨져 왔다.
국내에서는 1995년 은행법 개정을 통해 산업자본의 은행 의결권 지분 보유 한도를 4%로 제한하는 '은산분리'가 명문화되면서 제도가 본격화됐다.
실제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재벌의 무리한 차입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이 국가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됐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 공정거래법상 일반 지주회사의 금융·보험사 주식 소유 금지 조항이 강화되는 등 지난 30년간 금산분리는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규제 체계로 작동해 왔다.
주 위원장은 간담회에서 "서로 소통을 하게 된다면 훨씬 더 독립적인 소통이 이루어져야한다"며 "(그래야)훨씬 더 건설적인 방안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정위가 이번 투자 규제 완화 국면에서 규제 당국으로서의 '반대'역할을 해야 오히려 더 '건설적인' 방안이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주 위원장이 이번 금산분리 등 규제 완화가 특정 기업을 위한 '맞춤형 특혜'이자, 재벌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보고 견제구를 날린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최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이 AI 등 신산업 분야에 대한 과감히 투자하려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이 과정에서 금산분리 논란도 불거졌다.
공정거래법상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지주회사체제는 크게 일반 지주회사와 금융지주회사로 나눠진다. 일반 지주회사의 경우, 금융 계열사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금융지주회사의 계열사는 금융사로만 이뤄져야 한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일반 지주회사의 손자회사인 SK하이닉스의 경우 금융회사를 갖지 못하니, 사실상 외부 자금 유치가 봉쇄됐다. 막대한 AI 반도체 투자금이 필요한 SK 입장에서는 금산분리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 위원장은 "기업들이 투자 회사를 만들어서 (소프트뱅크의)손정의씨처럼 여기저기 투자를 확대하고 이거는 좀 아닌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될 경우, 연구를 통한 성장과 혁신보다는 '자금 굴리기'를 통한 경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는 비판이다.
최근 이러한 우려에 최 회장도 "금산 분리(규제 완화)를 원하는 게 아니다"라며 "(대규모 인공지능 분야) 투자를 감당할 새로운 제도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공정위원장의 '원칙론'과 경제부처의 '현실론' 사이의 치열한 줄다리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최종적인 정책 방향이 정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된다.